[스크린 산책]‘웨일 라이더’… 소녀 ‘고래의 전설’ 만나다

  • 입력 2004년 9월 23일 22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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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신비로운 전설. 그리고 인간이 벌이는 애증의 드라마가 절묘하게 접점을 찾는 뉴질랜드 영화 ‘웨일 라이더’. -사진제공 프리비젼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신비로운 전설. 그리고 인간이 벌이는 애증의 드라마가 절묘하게 접점을 찾는 뉴질랜드 영화 ‘웨일 라이더’. -사진제공 프리비젼
《뉴질랜드의 해변 마을. 스스로가 수천년 전 고래의 등을 타고 온 조상 파이키아의 후손이라고 믿는 마오리족의 후예들이 산다. 족장 코로는 장남이 족장을 계승하는 전통에 따라 장남에게서 손자를 기대하지만, 며느리는 출산 중 숨을 거두고 손녀 파이가 태어난다. 아들은 충격으로 집을 떠나고, 족장 코로는 마을 남자아이들 가운데 후계자를 물색한다. 하지만 파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지도자의 기질과 능력, 신통력을 갖춰간다. 할아버지는 이런 손녀 파이를 부정하려 한다.》

10월 8일 개봉되는 뉴질랜드 영화 ‘웨일 라이더(Whale Rider)’의 기둥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신구세대가 벌이는 갈등과 화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런 익숙한 테마를 살짝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전통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할아버지, 억압돼 살아온 할머니, 고향을 등진 아버지, 희망을 접고 아웃사이더로 사는 뚱뚱이 삼촌, 관습과 편견의 희생자인 파이 자신 등 어느 누구도 ‘나쁜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전통과 새로움의 경계선에 서는 순간 물러날 수 없는 ‘전선’을 형성한다. 이들 모두는 피해자다.

이 영화의 묘미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고래에 얽힌 전설(또는 관습) △인간 애증의 드라마라는 3개 핵심요소가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 관객에게 신비로운 체험의 순간을 선물하는 데 있다.

이 영화를 보다가 만약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아름다움과 감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의 응어리 때문이기도 하다. 상반된 이런 감정들은 이상하리만큼 충돌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뜨겁게 껴안는다.

‘웨일 라이더’에서 또 주목할 것은 갈등을 만드는 방식이 아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얽히고설킨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결정적인 사건을 클라이맥스에 배치하는 대신 ‘고래의 전설’을 끌어들여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녹여버린다. 거대한 고래의 등에 올라타고 바다의 중심을 향해 순사(殉死)하듯 달려가는 파이의 모습을 담은 이 판타지는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지거나, 상처주거나 상처받지 않은 채 서로 화해하도록 만드는 절묘한 탈출구가 된다.

이 영화는 백인여성을 새 아내로 데려온 아들의 모습과 여성들이 처음으로 제의(祭儀)에 참가하는 라스트 신을 보여준다.

이는 절멸해 가는 현대 마오리족에게 ‘타 종족의 피를 수혈하고 남녀가 함께 미래를 짊어진다’는 대안적 종족유지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여기서 ‘여권 신장’ 혹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너무 좁게 읽은 것이다.

파이 역의 케이샤 캐슬휴즈는 이 영화로 데뷔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맨발만으로도 슬픔과 감동을 만들어낼 줄 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역대 최연소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뉴질랜드 출신 여성 감독 니키 카로 연출. 2003년 선댄스 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 관객상 수상작이다. 전체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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