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팜 파탈이 몰려온다, 밀라노 패션위크 현장서 본 ‘키워드10’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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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패션위크의 포문을 연 구치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면서도 힘 있는‘파워 우먼’을 구현했다. 구치의 크리이에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영국의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에서 영감을 얻은 페티시적인 미학은 구두를 통해 극대화됐다. 사진=인터패션플래닝,
 구치 제공
밀라노 패션위크의 포문을 연 구치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면서도 힘 있는‘파워 우먼’을 구현했다. 구치의 크리이에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영국의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에서 영감을 얻은 페티시적인 미학은 구두를 통해 극대화됐다. 사진=인터패션플래닝, 구치 제공
아찔한 곳까지 깊게 파인 블랙 펜슬 스커트, 세로로 줄이 난 섹시한 스타킹, 잔근육 하나하나에까지 긴장감을 줄 정도로 아찔할 킬힐, 레이스 소재라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관능적인 드레스….

2013년 가을·겨울을 겨냥한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가 시작된 20일. 관심을 모았던 구치 컬렉션은 얼어붙은 이탈리아 경제를 금세 후끈 달아오르게 하려 작심한 듯, 섹시하고 파워풀했다. 우연히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과 겹친 이탈리아 대통령 선거 때문에라도 이번 시즌엔 특히 정치와 패션의 연관성을 떼놓고 생각하기가 어렵게 됐다. 대선의 화두가 경기 회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경제적인 이슈까지도.

패션쇼와 프레젠테이션을 합쳐 총 72개의 브랜드가 경합하면서 1년 뒤 트렌드를 보여준 밀라노 패션위크 속 키워드 10선을 트렌드전문가그룹 인터패션플래닝의 이경희 컨설팅본부장의 도움을 받아 정리했다. A style이 취재한 따끈한 패션쇼장 안팎 이야기에도 주목해 보시길.


▼ 구치, 파워 우먼의 당당함 넘쳐… 프라다, 치명적 관능미 후끈 ▼

중성적인 매력을 담은 앤드로지너스룩이 회귀했다. 모스키노가 선보인 섹시한 슈트.
중성적인 매력을 담은 앤드로지너스룩이 회귀했다. 모스키노가 선보인 섹시한 슈트.
1. 다크 글램(Dark glam)

어둡지만 치명적인 매력. 2012년 가을·겨울 시즌, 유독 강세를 보였던 다크 무드는 이번 시즌에도 주요 트렌드로 등장했다. 2012년 시즌에 보여준 테마, ‘글램 고스(Glam Goth)’의 연장선상에서 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는 여성의 매력을 ‘치명적이고, 위험한 여성스러움’으로 풀어냈다. 지아니니는 이번 쇼 테마에 대해 “금속처럼 차가우면서도 섹시하고, 스스로를 팜 파탈로 정의하는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지아니니의 쇼가 늘 그렇듯, 저절로 몸으로 리듬을 타게 하는 비트 있는 음악으로 포문을 연 구치 컬렉션에선 스모키 화장을 극대화하고, 눈썹을 옅게 해 이마가 최대한 넓어 보이게 표현한 올백 머리 여성들이 차례로 걸어 나왔다. 힘이든 능력이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파워 우먼이 테마인 듯했다.

특히 발등 부분을 적당히 덮어주는 힐 등 구두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등극할 만했다. 쇼장에선 찰나처럼 스쳐간 컬렉션 의상들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게 기자들에게 공개하는 쇼룸 행사에서도 자석처럼 이 구두에게로 가장 먼저 몸이 끌려갔다. 여성의 ‘S 라인’을 연상시키듯, 발목부터 굽 끝까지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이 다시 봐도 인상적이었다. 구치 관계자는 “영국 출신의 팝아티스트 앨런 존스가 선보이는 페티시적인 미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치 쇼의 대미는 지아니니 본인이 장식했다. 젓가락처럼 날씬한 모델들이, 이 몸매를 더욱 날씬해 보이게 하는 옷들로 ‘I(꼿꼿한 젓가락 모양의 알파벳) 라인’을 선보였다면 지아니니는 아름다운 ‘D 라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가벼운 블랙 실크 소재 옷 아래로, 숨김없이 드러난 만삭의 배는 그가 컬렉션과 첫아기라는 두 소중한 존재를 동시에 잉태하고 있었음을 수줍게 고백했다. 아기 아빠는, 현재 구치를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CEO)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 사장(52)이다. 경영과 디자인의 사령탑을 각각 맡고 있는 두 사람이 공개 사내 연애를 시작한 이후 사랑의 결실까지 맺게 된 셈이다.

이번 컬렉션을 끝으로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지아니니를 따라, 디 마르코 사장 역시 지아니니가 살고 있는 로마로 향할 예정이다. 딸을 낳을 것이라니, 구치의 아동복 라인이 한결 예뻐질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도 벌써부터 나온다.

시스루 드레스와 가죽을 매치하는 시도도 여러 브랜드에서 이뤄졌다. 로베르토 카발리는 퍼와 벨벳, 자카드 등의 고급 소재를 플로럴 프린트로 표현한 ‘다크 로맨틱 무드’를 완성했다. 알베르타 페레티는 속이 비치는 소재를 사용한 블랙 드레스를 대거 무대에 올렸다.

조신한 느낌과 도발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프라다 컬렉션.
조신한 느낌과 도발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프라다 컬렉션.
2. 매니시

1월 열린 남성 컬렉션의 데자뷔(기시감)인가. 여성 컬렉션 기간에 웬 남성복들일까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중성적인 매력을 담은 ‘앤드로지너스룩’이 2013년 가을·겨울 다시 회귀했다. 물론 딱딱한 남성 정장보다는 매력적이고 발랄하다. ‘디스퀘어드2’는 멋지게 더블브레스트로 차려입은 매니시한 코트와 보타이, 팬츠 슈트, 1940년대 스타일의 페도라까지 제대로 남자 스타일로 차려입은 아리따운 여자 모델들을 무대로 내보냈다. 블루마린 역시 어깨가 강조된 팬츠 슈트, 발목까지 내려오는 트렌치코트와 함께 페도라 등 남성적인 소재를 대거 선보였다. 하지만 경쾌한 색상과 가슴 부위에 깊은 V라인을 내는 등의 방식으로 여성적인 특징을 드러냈다.

3. 섹시 엘레강스

밀라노 패션위크 이튿날부터는 눈과 강추위가 한꺼번에 몰려와 쇼장으로 이동하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밀라노 현지인들도 “2월 하순에 눈이라니…. 정말 드문 일”이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 탓에 차가 막힐까 발걸음을 재촉했더니 기자 앞에 선 사람은 오직 두 명뿐. 쇼장에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다. 게다가 프라다 쇼는 쇼 직전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니, 눈보라 속에서 약 50분을 대기하다 눈사람이 될 뻔했다.

정열적인 빨간색 원피스로 섹시 엘레강스를 표현한 안테프리마 컬렉션.
정열적인 빨간색 원피스로 섹시 엘레강스를 표현한 안테프리마 컬렉션.
쇼장에선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 손짓을 하는 여성의 실루엣이 한쪽 벽면에서 동영상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쇼는, 그러나 보자마자 내 옷장에 우겨 넣고 싶은 탐나는 아이템으로 가득했다.

비를 잔뜩 맞은 듯 화장이 약간 지워진 상태로 촉촉한 머리를 한 모델들이 사뿐히 걸어오는 순간,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젖은 여자’가 주는 매력도 벅찰 지경인데 스웨터의 한쪽을 내려 어깨를 사뿐히 드러내기까지 하다니….

매번 엘레강스를 테마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면서도 정형화된 ‘레이디 라이크 룩’은 경계하는 프라다의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플레어스커트로 복고적인 느낌을 내고, 무릎을 살짝 덮을 정도의 스커트로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면서도 다양한 색깔로 지루함을 달랜 점도 눈에 띄었다. 이 브랜드를 이끄는 미우치우 프라다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강조되는 시대라, 여성적인 것을 너무 여성적으로 풀어내는 것도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의 판타지를 자아나는 관능으로 풀어낸 프라다의 파격은 그래서 영민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항상 정교하고 여성스러운 룩을 선보인 알베르타 페레티는 관능성과 여성성, 그리고 깨질 것 같은 예민함을 대표 무드로 내세웠다. 복고풍 스커트로 밑단이 넓게 퍼지는 실루엣, A라인 실루엣, S라인을 살리는 아워글라스 실루엣 등 여성의 몸을 A부터 Z까지 총체적으로 분석한 뒤 이뤄진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중국 스타일인 ‘시누아즈리’ 트렌드가 반영된 구치 컬렉션.
중국 스타일인 ‘시누아즈리’ 트렌드가 반영된 구치 컬렉션.
4. 아시안 스피릿

구치의 프리다 지아니니가 올 시즌 처음 시도한 모티브는 고사리나 일엽초가 속한 양치식물이다. 이 패턴을 위해 이번 시즌 핵심 색상 중 하나인 모스 그린(이끼색)이 등장했나 싶을 정도로, 양치식물 패턴은 전체 컬렉션을 통틀어 봐도 압도적인 느낌을 줬다.

이 패턴은 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유행하던 ‘시누어즈리(chinoiserie)’ 트렌드에서 영감을 받은 것. 유럽인의 관점에서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중국식 의상, 중국풍 디자인이 모두 이 트렌드와 맞물린다. 이를 두고 불황에 허덕이는 럭셔리 업계의 구원자로 중국인들의 손을 다시 한 번 들어준 셈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많다.

저스트 카발리는 부탄의 민속 무늬에서 영감을 얻은 ‘부타니즈 프린트 튜닉’을 이번 시즌 핵심 아이템으로 내놓았다. 호랑이 불꽃 나뭇잎 모양 패턴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질적이면서도 젊고 발랄하게 어우러지는 요소를 접목한 것. 보테가 베네타는 오리가미, 기모노 스타일 등 주로 일본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들을 선보였다.
  
  
  
  
  
  
섹시한 펜슬 스커트를 선보인 디스퀘어드2.
섹시한 펜슬 스커트를 선보인 디스퀘어드2.
▼ 섹시한 펜슬 스커트 쏟아져 나와… 펜디는 작심하고 모피 잔치 ▼

5. 펜슬 스커트

‘섹시한 비서룩’을 연상케 하는 펜슬 스커트는 여성이 입을 수 있는 가장 섹시한 패션 아이템 중 하나다. 밑단이 연필처럼 좁은 탓에 보폭이 커질 수 없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옆이나 뒤에 슬릿을 주면서 숨은 속살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펜슬 스커트는 거의 모든 브랜드에서 선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릿도 전통적인 뒤쪽 대신 양쪽 옆을 파는 방식, 랩스커드 형식 등 다양하게 등장했다.

  
  

      
  
  

6. 풀 스커트
치맛단이 넓게 퍼지는 프라다의 풀 스커트.
치맛단이 넓게 퍼지는 프라다의 풀 스커트.


프라다 쇼에서 촉촉이 젖은 모델들이 힘차게 풀 스커트를 나풀거리고 걸어 나오는 순간, 많은 여심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0, 50년대 스타일의 스커트는 지난 봄 시즌 대비 길어져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이 인기를 끌 듯하다. 포츠1961도 경건한 느낌을 주는 회색 원피스의 밑단을 옆으로 살짝 퍼지는 풀 스커트 스타일로 선보여 시선을 끌었다.

7. 퍼(fur), 퍼, 퍼

모피는 전통적으로 럭셔리 패션의 주요 소재로 통했다. 그러나 럭셔리 브랜드들조차 동물보호단체와 동물애호가들의 항의 탓에 모피를 팔기는 해도 대놓고 홍보하진 못했다. 매번 패션쇼마다 모피 반대 시위가 펼쳐지는 바람에 쇼장 진입을 막으려는 경비요원과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의 멱살잡이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 패션’의 정수를 보여준 펜디.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 패션’의 정수를 보여준 펜디.


이런 상황에서 펜디는 모피를 컬렉션 전반에 대거 등장시키며 작심한 듯 정통성을 뽐냈다. 모피에서부터 사업을 일궈온 만큼 DNA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걸까.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다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더이상 태생을 숨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모피는 올드 레이디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깨듯 형광 핑크, 옐로 등으로 과감하게 세로 스트라이프 패턴을 시도한 점도 돋보였다.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 정수리 부위에 퍼를 붙이고, 선글라스 테두리에까지 퍼 장식을 곁들인 펜디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한 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를 라거펠트의 모습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건재하며 펜디와 샤넬이라는 메가톤급 패션하우스를 한꺼번에 이끌고 있는 그는 이날도 쇼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살랑 흔들며 무대를 내려가는 여유를 선보였다.

 
 
 
  
  
  
구치는 남성복 정장에 주로 쓰이던 체크무늬를 여성복에 접목했다.
구치는 남성복 정장에 주로 쓰이던 체크무늬를 여성복에 접목했다.
8. 맨스타일 체크

뉴욕 컬렉션에서 큰 흐름을 이뤘던 체크 패턴, 그중에서도 플레이드 문양이 밀라노에서도 재현됐다. 특히 모스키노와 베르사체가 주요 아이템에 강렬한 타탄체크를 접목해 인상적이었다. 매니시 룩의 연장선상에서, 남성복 정장에 주로 쓰이는 하운드투스(Houndstooth·새발 격자무늬) 패턴이 대거 등장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구치와 알베르타 페레티, 안토니오 마라스 등이 이번 시즌 하운드투스 패턴을 과감히 채택했다.

 
 
 
 
 

9. 메탈릭 골드+실버

반짝이는 메탈릭 골드 색상의 원피스를 선보인 안토니오 마라스의 컬렉션.
반짝이는 메탈릭 골드 색상의 원피스를 선보인 안토니오 마라스의 컬렉션.
안토니오 마라스의 컬렉션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을 가장 시리게 했던 아이템은 허리 부분을 잘록하게 꾸민 메탈릭 골드 드레스였다. 금색이 가진 그 많은 상징성 때문에, 이런저런 해석을 덧대고도 싶지만 그런 의미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예쁜 의상들이었다.

메탈릭 컬러는 통상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로 통한다. 불황의 늪에 허덕이는 경제 위기를 딛고, 선거 이후 더 힘찬 이탈리아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이곳 디자이너들의 애국심 때문일까. 프라다는 허리띠나 스커트를 금색 또는 은색으로 매치한 스타일링을, 블루걸은 골드빛 드레스와 롱스커트를 선보이는 등 메탈릭 컬러는 포인트 컬러로, 또 때로는 주조색으로 쓰이며 패션위크의 열기를 북돋웠다.

  

  

테디베어처럼 포근해 보이는 막스마라의 오버사이즈 코트.
테디베어처럼 포근해 보이는 막스마라의 오버사이즈 코트.
10. 오버사이즈 코트

지난해 등장해 한 번 이슈가 됐던 오버사이즈 코트가 올 가을·겨울에도 대세로 떠오를 듯. 막스마라는 테디베어처럼 온몸을 포근히 감싸주다 못해, 가녀린 몸을 압도하는 듯 ‘슈퍼 빅’ 사이즈로 만든 황토색 오버사이즈 코트를 다양한 스타일로 선보였다.

글·밀라노=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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