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교수의 여가클리닉]평범한 일상에서 큰 즐거움을…

  • 입력 2002년 6월 13일 20시 14분


Q: 잠실에 사는 김민규라고 합니다. 요즘 축구 정말 재미있어요. 축구에 전혀 관심도 없던 제 아내도 베컴의 플레이가 어떻고 안정환의 머리스타일이 어떻고 하면서 시간만 되면 저보다 먼저 TV 리모컨을 잡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좀 걱정돼요. 월드컵이 끝나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죠?

A: 사실 저도 걱정됩니다. 요즘처럼 기대하고 바라는 일이 명확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월드컵이 인생의 목적이 된 기분입니다. 그런데 왜 월드컵이 이토록 재미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그 동안 사는 재미를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이전에 제일 재미있었던 일은 정치인들 욕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재미로 욕하기에는 정말 너무한다 싶을 때, 때마침 월드컵이 시작된 겁니다. 연예인 뺨치는 미남들이 공까지 잘 차니 그저 보기만 해도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히딩크라는 묘한 사나이가 오른손 어퍼컷을 올려치며 기뻐하는 모습은 홍수환의 4전5기 이후로 잃어버렸던 영웅을 되찾은 기분을 안겨줍니다.

월드컵 때문에 온 국민의 기분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사는 재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월드컵에 뭔가 엄청난 재미가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공 하나가 그물 망에 들어가는 일에 불과한, 말 그대로 공놀이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공 하나 때문에 몇 주일 전에 비해 피부로 느끼는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겁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에는 목숨 걸면서(예를 들어 운전하다 끼어들기 하는 얌체들과 일전불사를 외치며 못 끼어들도록 막는 것처럼), 사는 재미 또한 아주 사소한 데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미는 항상 엄청나야 한다는 기대만 버린다면 사소한 재미들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내를 위한 책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책’이라는 형식에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아내가 축구에 열광하는 모습 같은 것들을 적어보는 겁니다. 아니면 세세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 잔잔한 기쁨을 메모로 남길 수도 있고요. 체리북(cherrybook.com) 같은 곳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모아 아주 우아한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50페이지짜리 책이라도 2만∼3만원이면 아주 고급스럽게 만들 수 있어요. 그 책을 받아 든 아내의 표정이나 아이들이 커서 그 책을 읽게 될 때를 상상하면서 하루에 단 몇 줄의 메모라도 남기는 사소한 재미가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른한 오후의 사무실 책상에서 소박하지만 가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민규씨의 뒷모습은 골 넣고 결혼반지에 키스하던 안정환에 전혀 뒤지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월드컵이 끝나도 그리 허전하지 않을 거예요.

www.leisure-studies.com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교수·심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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