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문화 우리건축]예식장-일그러진 건물

  • 입력 1999년 11월 7일 20시 05분


아담은 갈비뼈를 하나 제공했을 뿐이다. 아담과 이브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록은 없다.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웅녀가 환웅을 만났지만 그들이 냉수라도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복잡해진 세상은 결혼이 사회적 행사로 자리잡게 했다. 안방에서 진통하는 산모가 없어지듯 마당에서 혼례를 올리는 풍습도 사라졌다. 그 역할은 예식장이 거두어 들였다.

예식장은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건물 형식. 식장 외에 로비, 피로연장, 폐백실, 신부 대기실로 이루어진 예식장은 한국 사회의 단면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건물이 되었다.

간판은 이미 ‘웨딩홀’이라고 바뀌었다. 서양식 예복을 입고 예식을 진행하는 식장은 서양식 건물인 교회와 강당이 적당히 조합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십자가가 없는 점은 강당에 가깝고, 좌석 가운데 통로가 나 있는 점은 교회에 가깝다.

예식장이 처음 선보인 것은 일제시대. 그런 만큼 일본의 영향도 스며들었다. 마당에서 벌어지던 잔치는 사라지고 음식점에서 거행하는 피로연이 결혼식 뒤에 끼어 든 것이다. 음식은 국수에서 갈비탕으로, 갈비탕에서 뷔페식당의 종합메뉴로 발빠르게 변해갔다. 그러면서 피로연장도 예식장 건물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살아남은 유교적 전통도 있다. 이 총각과 저 처녀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집 아들과 저 집 딸이 만나 결혼한다는 가족 중심적 사고는 결혼식의 규모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덕분에 결혼식장은 가문의 자존심 대결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 후기 철종시대에 보리쌀 다섯말을 주고 족보를 산 집안이어도 결혼식장에서는 뼈대있는 양반 집안임을 과시해야 했다.

로비는 바로 그 현장이 되었다. 신랑 신부의 부모는 로비에 늘어서서 밀려드는 하객과 악수를 나눠야 한다. 하객의 수는 사회적 영향력의 크기. 결혼식에 참석해 봉투를 내밀고 방명록에 서명한 후, 눈도장 찍는 것은 한국의 사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

그 인원을 수용하려니 로비는 상대적으로 커졌다. 로비에는 유럽의 바로크 시대에 해놓았을 법한 조각과 장식이 가문의 명망만큼 화려하게 들어섰다. 그 조각과 장식은 물론 속 빈 모조품들이다.

전통 속의 가부장적 사고는 폐백을 통해 살아 남았다. 5분 전에도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던 신랑 신부는 사모관대에 연지곤지를 바르고 절을 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상업적인 의식이 되었는지, 얼마나 남녀를 차별하는지는 가문의 체통상 물을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건물 구석에는 병풍 두른 폐백식장이 마련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의 주인공도 손님도 아니다. 사진기의 피사체에 지나지 않는다. 건물은 그 피사체의 배경일 뿐이다. 사진에 인화된 배경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길은 없다. 종잇장 같은 껍데기 장식이어도 사진에 화려하게 나온다고 하면 용서되었다. 신랑과 신부의 사진촬영을 위해 예식장 앞에는 인공폭포와 노송(老松)이라는 조경시설도 마련되었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외관이 결정되어야 했다. 서양식 결혼을 담는 건물로 가장 먼저 다가선 이름은 신데렐라. 계모와 이복 언니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잘 생기고 착한 왕자가 사는 궁으로 입성한다는 현실감 없는 동화를 건물은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예식장은 뾰족 탑이 있는 성채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결혼식은 화려해야 한다면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건물 모습을 빌려오기도 했다. 예식장은 그렇게 간판이 없어도 알아볼 수 있는 건물 형식이 되었다.

결혼식에는 주술적 신앙도 끼어 들었다. 주말과 길일에만 몰려드는 신랑신부는 예식장의 공급 부족을 만들었다. 어제의 볼링장도, 공장도 오늘은 결혼식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머지 5일간은 유례없는 공급과잉이 된다. 30분 단위의 예식으로 소란하던 예식장은 인적 없는 폐허가 되어 거리를 그만큼 황량하게 한다.

우리의 결혼식에 관한 사회적 자탄의 목소리는 높다. 도시와 건축의 면에서 봐도 예식장은 건강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품위보다는 화려함, 엄숙함보다는 요란함으로 치장한 건물이 호텔, 성당, 교회로 향하는 신랑 신부의 발길을 돌릴 수 없다.

무대 장식 같은 건물이 격조 있다고 광고하는 것은 21세기를 향해 내달리는 신랑 신부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모독이다. 이것저것 가져다 붙인 건물의 미래는 그래서 어둡다. 건물의 품위를 찾고, 예식이 되었든 다른 행사가 되었든 주중에 그 공간을 채워 넣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또 많은 건축 폐기물을 떠안게 될 것이다.

여러 문화가 버무려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문화가 가장 값싸고 무신경하게 조합된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일그러진 예식장의 모습은 그래서 슬프다. 신데렐라는 울고 있다. 거추장스런 드레스에 화장실을 갈 수도 없고, 폐백시간 때문에 밥을 먹을 수도 없고, 화장이 지워질까봐 눈물을 닦을 수도 없는 신데렐라는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다. 건물도 도시도 문화도 그렇게 울고 있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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