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김원일 '나는 누구냐' 정체성 잃은 우리 자화상

  • 입력 2000년 8월 25일 18시 54분


김원일의 소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작품도 고난의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무참하게 비틀리고 휘어진 한 개인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작품의 서두에서 거울 앞에 앉아 공들여 화장하는 행동을 시작으로 등장하는 노파 한씨는 자신의 ‘귀부인’ 이미지에 강박증적 집착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팔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한씨는 양로원 동거인들에게서 ‘광대댁’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치장하는 데 열심이며 김소월을 읽고 푸치니를 듣는 고상한 취미를 뽐낸다.

그러나 그 노파의 김춰진 마음을 들여다보는 서술을 통해서 그러한 집착은 그녀의 부끄러운 자아를 은폐하려는 욕망의 표현임이 밝혀진다. 그녀가 자기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그 곱게 화장한 마님의 표정 아래엔 가난하고 힘없는 탓에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능욕을 당한 불운한 여성의 일그러진 얼굴이 있다.

노파 한씨의 이력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한국여성들이라면 저마다 거쳤을지 모를 고난 중에서도 특히 기구한 형태의 고난을 예시하는 듯하다. 열여덟 나이에 ‘호강’에 대한 기대를 품고 방물 장수를 따라 ‘대처’로 나간 그녀는 젊은 시절을 굴욕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 보냈다. 점원으로 일하던 제과점의 일본인 주인에게 순결을 빼앗겼고 말라카 주둔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 노릇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양공주가 되어 기르지 못할 자식까지 낳았다. 서술상의 현재 그녀는 비록 경제적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내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불행의 상흔은 뚜렷하다.

그 흔적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은 그녀에게 어떤 통일된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점아가, 경자, 게이코, 안나와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이 시사하듯, 그녀는 변화하는 환경이 규정하는 대로 살아남기에 급급한 결과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한씨의 사연은 팔자가 기구한 여자의 일생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많은 생각을 유발하는 함축이 있다. 한씨의 일생은 단지 파란 많은 생애가 아니라 한씨 자신이 이야기의 형태로 인식되지 못하는 혼란이다. 그녀는 살아온 과거가 치욕으로 점철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을 현재의 자신 속으로 돌이켜 끌어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거부된 과거의 기억은 치매에 걸린 그녀의 내면적 혼란이 예시하는 것처럼 흩어져 떠다니는 상태에 있다.

그녀가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아는 그것의 역사를 통해서, 즉 그것에 응집성 있는 서사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되고, 정의되고,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씨의 비극은 야만의 세월이 힘없는 여성에게 초래한 비극이라기보다는 수모의 체험으로 인한 거부와 위장의 메커니즘이 개인에게 가져온 비극이다.

이렇게 읽으면 ‘나는 누구냐’는 회상의 능력을 점점 잃고 있는 현재의 한국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민족의 치욕이라고 해체하여 없애고 소비의 천국을 향해 질주하는 한국사회는 부끄러운 이력과 몰골을 감추려 애쓰고 ‘꿀 같은 쾌락’의 단편적 기억에 들려 있는 노파 한씨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

김원일은 치매에 걸린 노파의 내면에 시추를 드리워 주체적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한 세대 한국의 비극을 밝혀낸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수치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특유의 능력을 발휘한 반면, 그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혹은 자아를 구제하는 적절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시사하진 않는다. 한씨가 대표하는 특정한 인간 현실에 서술자가 지나치게 밀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 자신이 자아의 이념에 회의적인 까닭일까.

황종연(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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