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황종연/이윤기 소설집 '두물머리'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08분


아내와 사별한 한 중년 남자가 약수암(若水庵)이라는 어느 산중의 암자를 찾아간다. 황폐한 절터에 지어진 그 암자의 주인은 자연이라는 법명을 가진 여승이다. 속세에선 그 남자의 가까운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자연 스님은 성속의 구별조차 뛰어넘은 듯한 소탈한 풍모를 보여준다. 남자는 자연 스님을 찾아온 손님 중에서 민지 수녀를 발견하고 그들이 신앙의 차이에 구애됨 없이 교유하는 사이임을 알게 된다. 남자의 눈에 비친 자연 스님과 민지 수녀는 모두 분별과 집착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들 세 사람은 해장죽을 태워 군불을 지핀 방안에서 겸상으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남자는 자연 스님의 권유에 따라 ‘세 동무’라는 노래를 부르고 그들은 모두 그 처연한 노래의 감흥에 취한다. ‘바다를 품은 대나무’(해장죽)가 폭죽소리를 내며 불꽃으로 변하는 한밤중, 암자에 모인 사람들을 교감에 젖게 하는 회한의 노래! 여기에는 인간이 그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 가장 고양된 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이 ‘세 동무’라는 단편은 이윤기 소설집 ‘두물머리’(민음사)에 실린 중단편 중에서 그 자체로 문학적 격조가 높은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이윤기 소설의 개성을 예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기보존의 욕망이 지배하는 일상이 정지되고 생에 대한 비범한 직관이 일어나는 특별한 정황, 인간 존재에 대하여 무궁한 흥미와 명상적 태도를 갖고 있는 현자(賢者)풍의 인물, 위트와 유머가 넘치면서도 언제나 어떤 계시를 향해 움직이는 대화, 플롯 구성보다 교훈 전달에 주력하는 서사 형식 등은 이윤기 소설 전반에 대충 들어맞는 특징들이다. ‘세 동무’의 남자가 ‘사람 사는 데가 참 슬프게 아름다운 곳’이라는 감회에 이르듯이, 어떤 일반적 진실과 만나는 이례적인 각성의 계기를 보여주는 것은 이윤기 소설의 주요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윤기 소설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소설보다는 우화에 가깝다. 그의 소설은 인간 현실을 재현하면서 실제의 현실에는 결여된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서사물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오랜 전통에 닿아 있는 교훈적 픽션이다. 그의 소설에 형식상의 원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의 대화나 선가의 어록과 같은 변증일 것이다. 거짓을 깨뜨리고 바름을 드러내는 방식(破邪顯正), 또는 상식을 거슬러서 진리에 합치되는 방식(反常合道) 등과 같은 변증의 전형적 논리는 ‘숨은 그림 찾기’ 연작처럼 작중인물간의 대화를 통한 계몽의 과정을 담은 작품만이 아니라 각성의 순간을 담은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 구성 원리가 되어 있다. 이러한 변증의 서사적 번안을 통해 그의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보통 ‘지혜’라고 부르는 특별한 철학적 지식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삶의 축적된 체험에서 솟아나면서 또한 사물의 깊은 이치에 이어져 있는 어떤 것이다. 이윤기가 중점을 두는 지혜는 이성이 아니라 자연, 명분이 아니라 실상, ‘로고스’가 아니라 ‘뮈토스’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삶의 어떤 원초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다.

지혜를 말하는 소설이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소설은 체험적 지혜가 권위를 잃어버린 결과 생겨나지 않았던가. 안방에서부터 별자리에까지 미치는 마법이 붕괴한 결과 성립하지 않았던가. 변증의 서사는 조이스와 카프카를 거친 지금도 여전히 흥미로울까. 현자들의 청담(淸談)은 니체와 프로이드를 겪은 지금도 여전히 매혹적일까. 하지만 속단은 말자. 이윤기는 그러한 의심을 조만간 퇴치할 문학적 역량이 있다고 믿어지므로. ‘세 동무’의 자연 스님은 사찰의 잔해만 남은 절터에 초월성이 깃드는 암자를 지었다. 이윤기가 지혜로운 이야기의 폐허에 어떤 소설을 지을지 궁금하다.

황종연(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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