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이남호/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 입력 1999년 5월 14일 19시 08분


★ 「일식」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

장편소설 ‘일식’은 99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아쿠타가와상의 역대 수상작중 상당수는 그 신선함과 패기 때문에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번에는 작가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귀걸이를 한 신세대 대학생이라는 점이 작품보다 먼저 화제가 되었다.

‘일식’은 번역본으로 읽어도 잘 훈련된 고전적 문체를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학생의 나이에 그런 의고체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은 돋보인다. 그리고 비교적 충실한 자료수집과 이야기를 꾸며내는 능력이 일정 수준 이상임을 인정할 수 있다.

‘일식’의 시대배경은 중세 프랑스이다. 중세에 성행했던 마녀사냥과 연금술 그리고 안드로규노스(플라톤이 생각해낸 원초적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이다)를 소재로 해 신의 비밀을 탐구한 일종의 관념소설이다. 그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는 움베르토 에코나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을 혼합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적인 깊이나 정치성에 있어 에코의 소설에 크게 못 미치고 개성적 인물과 서사구조에 있어서도 쥐스킨트의 소설에 크게 못 미친다. 어디선가 그럴듯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빌어와 짜깁기한 혼성모방의 작품이라는 혐의가 짙다. 그런만큼 큰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매우 허술하고 유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소화되지 않은 관념과 지식이 어설프게 나열된 작품이며 뿌리가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서툰 외국작품의 저작권을 따는데 한국출판사들이 출혈경쟁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울하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심란하다.

이남호〈고려대교수·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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