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혀끝을 자극하는 인문서 2권 ‘철학을 맛보다’… ‘흑향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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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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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철학/신승철 지음/265쪽·1만5000원·동녘
◇커피, 치명적인 검은 유혹/김용범 지음·김윤아 그림/267쪽·1만4800원·채륜서

동녘 제공
동녘 제공
혀끝을 자극하는 인문서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식탁 위에 흔히 오르는 음식에서 철학적 단상을 끌어낸 책, 그리고 천재 예술가들의 일상을 지배한 커피에 얽힌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 발효에서 ‘변용’, 음식궁합에서 ‘이질생성’을

17세기에 등장한 잡채는 광해군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광해군은 밥상에 잡채가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고, 잡채를 만들어 진상한 이충이라는 사람에게 좌의정 벼슬까지 내렸다. 임금까지 푹 빠지게 만든 잡채의 매력은 여러 가지 채소가 당면과 만나 각각의 맛을 유지하면서도 색다른 맛을 내는 데 있다. ‘식탁 위의 철학’을 쓴 신승철 철학박사는 잡채를 ‘다양성 생산의 음식’으로 정의한다. 이어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와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며 차이와 다양성이 차별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질서의 문제를 지적한다. 차이와 다양성 존중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 사회는 잡채만도 못하다.

이 책은 저자가 아내와 함께 연구실 앞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요리를 하며 나눈 대화에서 비롯됐다. 음식 이야기가 제법 철학적인 대화로 발전한 것이다. “음식에는 문화 역사 철학 예술 정치 경제가 다 녹아들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음식으로부터 얻은 소소한 깨달음에 철학자들의 이론이 결합된다. 콩이 발효되어 된장이 되는 과정을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으로 설명하고, 완전히 다른 맛을 내는 두부와 김치가 만나 부드러우면서도 시큼하고 맵싸한 두부김치로 하나되는 순간은 가타리의 ‘이질생성’ 개념으로 풀어낸다.

흔히 접하는 음식을 통해 철학적 영감을 얻는 저자의 발상이 신선하다. 하지만 다양한 철학적 개념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사유를 찾는 독자라면 애피타이저를 먹고 한껏 식욕을 자극한 상태에서 정작 메인 메뉴 없이 식사를 마친 듯 충족되지 않은 기분이 들 수 있다. 때로는 과도하다 싶은 연상도 보인다. 예를 들어 소주의 투명함을 보며 사회에서 투명인간처럼 치부되는 장애인, 노인 등을 떠올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을 논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이야기하는 식이다.

○ 문화적 담론의 매개였던 ‘검은 유혹’

채륜서 제공
채륜서 제공
김용범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신간 ‘커피, 치명적인 검은 유혹’에서 랭보, 고흐, 헤밍웨이, 바흐 등 예술가들을 사로잡은 커피 이야기를 들려준다. 커피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대의 예술가들도 커피 한잔이 주는 각성과 도취에 힘입어 찬란한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에 은근한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인 박목월은 고된 ‘글쓰기 노동’을 지탱하기 위해 밤늦게 암죽처럼 진한 커피를 탔다. 쓰디쓴 커피는 그의 혈관을 치열하게 타고 내려가 순수한 문장으로 승화되었다. “사륵사륵/설탕이 녹는다./그 정결한 투신(投身)/그 고독한 용해(溶解)/아아/심야(深夜)의 커피/암갈색 심연(深淵)을/혼자/ 마신다.”(박목월 ‘심야의 커피’ 중)

짧지만 불꽃같은 31년을 살다 간 독문학자 전혜린은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내가 만일 다시 구라파에 간다면 나는 우선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1950년대의 고독한 독일 뮌헨 유학 시절에 그는 카페에서 커피 맛을 음미하며 예술과 철학의 담론을 나눴다. 그를 비롯해 전후 독일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쓴 커피로 식사를 대신하며 남루한 낭만을 즐겼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19세기 말 프랑스 문단을 시끄럽게 했던 시인 베를렌과의 동성애에 참혹한 종지부를 찍고 파리를 떠났다. 이 쓸쓸한 청년이 긴 방랑 끝에 함께한 것도 커피였다. 랭보는 죽기 전 11년간 에티오피아 하레르에 머물며 커피원두를 매매하는 상인으로 살았다. 저자는 에티오피아 하레르산(産) 커피를 마실 때면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시향(詩香)을 음미한다고 말한다. 커피 한잔이라도 이왕이면 애절하게 마시는 저자의 낭만적 허영을 차라리 닮고 싶어진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인문사회#식탁#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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