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正宮이 된 別宮, 500년 조선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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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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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깊이 읽기/국립고궁박물관 엮음/540쪽·2만8000원·글항아리

창덕궁은 조선 왕조 500년의 건축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자연과 건물이 조화를 이룬 인정전 일대. 인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창덕궁은 조선 왕조 500년의 건축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자연과 건물이 조화를 이룬 인정전 일대. 인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조선 24대 왕 헌종(1827∼1849). 8세의 나이로 즉위해 15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했지만 세도가의 위세에 눌려 통치다운 통치도 못한 채 23세 때 세상을 떠났다. 우리 머릿속에 별다른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이지만, 헌종은 태평시대에 태어났으면 널리 치세를 떨칠 수 있었던 ‘문화 군주’였다. 그는 수시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다른 이들의 문예 작품도 보고 즐겼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해 제주도에 유배된 그에게 글씨를 써서 올려 보내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런 헌종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창덕궁 낙선재와 낙선재 뒤편에 있는 승화루다. 정조가 세운 승화루에는 서화고(書畵庫)가 있는데 헌종 때는 보관 작품이 서첩 화첩 그림 글씨 등을 합쳐 3000점에 달했다. 왕은 종종 신하들과 함께 이 작품들을 읽고 감상했다. 이 같은 전통이 정조에서 순조, 효명세자(헌종의 아버지. 익종으로 추존)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조선왕조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의 명에 따라 별궁(別宮)으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때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소실된 후 정궁 역할을 맡았다. 오랫동안 왕의 사랑을 받은 궁이었고 조선왕조 문화가 집결된 곳인 동시에 정쟁과 사화, 궁중암투의 무대이기도 했다.

저자들은 궁의 역사부터 건축과 조경, 회화와 공예, 음악과 춤, 궁궐의 전통 풍수와 식생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창덕궁을 조망한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이 진행한 왕실문화 심층탐구 교양강좌가 책의 기반이 됐다. 김동욱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부 교수 등 각계 전문가 11명이 집필에 참여했다.

김동욱 교수가 창덕궁의 건축에 대해 소개한 글인 ‘창덕궁에 스며든 오백 년 세월, 그 어긋남의 미학’은 창덕궁 방문 계획이 있는 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김 교수는 “창덕궁의 건축은 집을 지으면서 인공을 최소화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담겨 있다. 건물들의 방향이 서로 비뚤어지더라도 자연 지형을 살리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자연과 건축의 조화는 창덕궁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궁은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됐다. 조선총독부는 궁궐 내 전각들을 철거했고 건물을 엉뚱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창덕궁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는 그들의 상징수인 벚나무를 창덕궁에 옮겨 심었다(현재는 모두 제거됐다). 순종 때는 메이지궁 정전을 모델로 해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의 내부구조와 창호 등을 개조했다. 이때 전통 어좌(御座)를 없애고 서양식 의자를 놓았다. 그래도 창덕궁은 왕실의 공간으로 남았으니 조선물산공진회의 관람장이 된 경복궁이나 일본인 학교가 된 경희궁, 심지어 동물원과 식물원이 된 창경궁에 비해 그나마 처지가 낫다고 해야 할까.

창덕궁의 경치를 담은 사진과 국보 249호인 동궐도를 비롯해 궁궐을 그린 옛 그림을 여럿 수록했다. 두꺼운 책이지만 편하게 읽힌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책의 향기#인문사회#창덕궁 깊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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