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분황사 가면 딸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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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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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속의 명소 답사, 박기성-고운기 씨 대담


길 위에 선 두 남자가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들고 20여 년째 전국을 돌고 있는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50)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들고 산에 오르는 33년 경력의 베테랑 산악인 박기성 씨(54)다. “역사책은 여행의 나침반”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을 서울 연세대 청송대에서 2일 만났다.

고 교수는 최근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를 냈고, 박 씨는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책만드는집)란 책을 출간했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왜 길이나 산 위에서 읽어야 한다는 걸까.

“일연은 운수(雲水·구름이나 물처럼 정처 없음)에 운명을 맡긴 승려였습니다. ‘삼국유사’는 책상 위에서 자료만 갖고 쓴 게 아니고 일연이 양양, 경주, 익산, 개성 등지 절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말로 ‘필드워크’를 한 거죠. 독자도 이야기의 소재가 된 곳마다 그 자리에 서서 그 대목을 읽으며 느껴봐야 합니다.”(고 교수)

“삼국사기는 절반 이상이 삼국통일 전쟁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높은 산성에 올라야 골짜기,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부산 황령산에 올라가면 탈해왕 때 병합한 동래 지역 40여 리에 걸쳐 있던 거칠산국의 범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황산벌 싸움은 평지에선 잘 못 느끼는데 김유신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갈마산에 오르면 치열했던 전황이 한눈에 들어오지요. 마치 사극을 보는 것처럼요.”(박 씨)

고 교수의 호는 여연(如然)이다. 일연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이번 책은 총 15권으로 계획한 필생의 역작 ‘스토리텔링 삼국유사’의 세 번째 책이다. 박 씨는 서울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월간 ‘사람과 산’의 창간 멤버가 됐다. 대학 산악부 때부터 요세미티, 칸텡그리, 가셔브룸 등 해외 고산 원정도 다녀온 산악인이다. 산 이야기에 역사를 버무린 글로 고정 독자를 확보해온 그는 “평생 좋아하는 두 가지, 산과 역사만 일구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고대사에서 부족한 한 줄의 기록은 오히려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고 교수나 사학을 전공했지만 산악인으로 살아온 박 씨는 전문 역사학자처럼 사실의 고증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글에선 자유가 느껴진다. 고 교수는 “텅 빈 절터에 서면 내 마음속의 스카이라인을 그린다”고 표현했다. 무너진 돌탑에서 이어지는 마음속 선을 따라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찾아 전국의 절터를 돌아다니는 고운기 교수(왼쪽)와 삼국사기의 배경이 된 산들을 오르는 박기성 씨. 고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나는 ‘보는 만큼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찾아 전국의 절터를 돌아다니는 고운기 교수(왼쪽)와 삼국사기의 배경이 된 산들을 오르는 박기성 씨. 고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나는 ‘보는 만큼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경주 분황사에 가면 눈먼 어린 딸을 위해 관음보살상 앞에서 노래를 부른 어미를 생각합니다. 그 앞에서 저도 향가 ‘천수대비가’를 한번 불러보는 거죠. 분황사 문을 열면 황룡사입니다. 지금은 빈터지만 그때는 구층탑이 우뚝 솟아 있었죠. 눈을 뜬 딸은 9층탑을 보고 환희가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고 교수)

“산에 오르면 수많은 역사인물을 만납니다. 지금도 하루에 오르기 빠듯한 태백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던 아달라이사금, 임금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삼태봉 개활지에서 서라벌을 넘봤던 탈해…. 또 수많은 미스터리도 떠오릅니다. 진흥왕의 첫 순수지 하림궁은 어디 있으며, 대가야 사람 우륵은 왜 거기서 가야금 연주를 했을까. 성왕과 백제군 2만9600여 명은 관산성에서 어떻게 그렇게 몰살을 당할 수 있었나.”(박 씨)

박 씨는 “이 미스터리들은 거의 자면서 풀었다”고 말했다. “꿈에 역사의 신이 나타나 답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잠들면 아침에 답이 떠오르곤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대표적 인물을 한 명씩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삼국사기의 스타는 단연 김유신입니다. 열전 10권 중 3권이 김유신 편으로 양적으로도 압도하죠. 김유신은 김부식이 생각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상적 인간형이었습니다. 반면 삼국유사의 대표 인물은 원효입니다. 원효는 인간적 실수도 많이 하지만 모두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기 때문에 일연이 가장 중요시한 인물입니다.”(고 교수)

박 씨는 “삼국사기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은 군사적으론 이사부 장군이고, 정치적으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었던 용춘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김유신이 수재였다면 이사부는 싸우지 않고도 신라 전성기 시절에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낸 천재였다”고 덧붙였다.

“용춘은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상과 계획은 아들 김춘추에 의해 실현됩니다. 용춘은 ‘외교는 활 쏘지 않는 전쟁과 같다’는 말을 깨달은 인물이었어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한 것을 ‘나라 팔아먹었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은 당나라 속에 들어가 당나라를 갖고 놀았던 거죠. 약소국이 강대국을 움직여 중강대국을 병합한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박 씨)

두 사람의 책은 직접 찍은 사진에 지도까지 곁들여 답사여행의 길잡이로 손색없다. 고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저는 ‘보는 만큼 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씨는 “대부분의 산꾼이 앞사람 발뒤꿈치만 따라 걷는데, 역사책을 들고 떠난다면 산길에서 차이는 돌멩이 하나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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