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파리에서/샤갈, 라퐁텐 우화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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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라퐁텐 우화/디디에 슐만 지음/프랑스 국립박물관협회, 1995년

3월 들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화사한 날씨가 연일 계속됐지만 파리의 봄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21세기 첫 전쟁으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수상쩍게 된 것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마찬가지다. 마음에 답답함을 누를 길 없던 필자에게 탈출구가 되어준 것은 ‘그랑 팔레’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마르크 샤갈(1887∼1985)의 그림들이었다.

몇 년 전 남프랑스 여행 때 보았던 그의 그림들은 파리에서도 여전히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안겨줬다. 파리 전시회에서 선보인 180여점의 작품 중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그림들은 라퐁텐 우화집에 삽화로 사용된 ‘과슈(gouache)’들이었다. 이 연작들은 유대계 러시아 출신 화가 샤갈이 1920년대 파리로 망명한 직후, 화상(畵商) 볼라르의 제안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림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면 감흥이 더욱 커질 것 같아 고른 책이 ‘샤갈, 라퐁텐 우화’다. 이 책은 1995년에 이미 초판이 나왔으나 이번 전시회에 맞춰 다시 출간된, 샤갈 관련 도서 중 하나다. 책의 앞부분에서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인 디디에 슐만의 친절한 해설이 나침반 역할을 한다. 이어서 라퐁텐의 짧은 동화들과 짝을 이뤄 샤갈의 삽화들이 쪽마다 선보인다. 그 덕에 독자들은 샤갈과 라퐁텐의 멋진 상상 속 세계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두 모습의 샤갈이 있다. 실험적인 샤갈과 감성적인 샤갈,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샤갈과 대중이 좋아하는 샤갈. 변함 없는 대중적 인기를 반영하는 것일까, 지난해 세계 미술 경매시장에서 샤갈의 작품은 판매 액수를 기준으로 마티스와 드가의 뒤를 이어 9위에 올랐다고 한다.

두 샤갈은 1925년 프랑스 망명을 전후해 나뉜다. 프랑스로 망명한 샤갈은 바로 라퐁텐의 삽화 작업을 통해 프랑스 문학과 첫 대면을 한다. 이때부터 고향 비테브스크의 추억과 유대적 뿌리를 간직하고 있던 그의 그림들 속으로 프랑스 풍경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라퐁텐의 삽화는 젊은 샤갈의 거칠고 즉흥적인 숨결을 길들여, 몽환적이고 시적인 샤갈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후 남프랑스인이 된 샤갈은 성경과 서커스로, 때로는 부케와 왕관을 들고, 색(色)의 향연을 계속한다. 대립되는 두 모습의 샤갈 사이에는 역설적이지만 끊임없이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해 온 샤갈의 긴 예술여정이 있다. 그의 현대성은 다른 작가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개인적 취향에 따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려 한 데 있을 뿐이다.

‘알려지지 않은 샤갈’의 다양한 모습을 찾고 싶은 독자들에게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으로, 이번 전시회의 카탈로그와 스톡 출판사의 ‘나의 삶’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제 Marc Chagall, Les fables de La Fontaine

임 준 서프랑스 LADL 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 joonseo@worldonlin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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