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돋보기 답사]해인사 팔만대장경

  • 입력 1997년 12월 30일 19시 53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은 자랑스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그러나 이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목조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1488년 건축)역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판전 없는 팔만대장경은 있을 수 없다. 경판전이 없다면 대장경을 제대로 보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단순 투박하고 엉성해보이는 이 경판전이 팔만대장경을 5백년 넘도록 완벽하게 지켜온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신비의 환기창이다. 경판전은 마주보는 두개의 긴 일자형 건물과 그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뤄져 있다. 긴 건물중 앞쪽이 수다라장(修多羅藏), 뒤쪽이 법보전(法寶殿). 두 건물의 앞뒷벽 위아래엔 각각 붙박이살 환기창이 있는데 이것이 비밀의 실체다. 특히 창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그 핵심. 수다라장 앞쪽벽 남향창은 아래창이 위창의 4배이고 뒤쪽벽의 북향창은 위창이 아래창의 1.5배 정도. 법보전도 각각의 크기는 좀 다르지만 비율은 비슷하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아래 위로 돌아나가도록 하고 동시에 공기유입량과 유출량을 조절함으로써 적정 습도를 유지하도록 절묘하게 고안한 것이다. 각 건물 앞쪽벽창과 뒤쪽벽창 전체의 크기(위아래창 모두 합친 것)를 비교해보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법보전은 뒤쪽벽 위아래창 전체 면적이 앞쪽보다 1.38배 넓고 수다라장은 뒤쪽이 앞쪽보다 1.85배 넓다. 이는 법보전이 수다라장에 비해 뒤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앞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내부에 남는 양은 적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랬을까. 김동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한국건축사)은 『법보전이 수다라장보다 뒤쪽 계곡에 가까이 있어 주변 습기가 많은 점을 고려, 공기의 잔량을 적게함으로써 습기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당시 건축인들은 이처럼 경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창의 크기와 위치를 조절,완벽한 통풍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겉보기엔 그저 숭숭 구멍 뚫어놓은, 무심한 창같아 보이지만 당시의 탁월한 건축술이 살아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또 건물 내부 장식을 피하고 지붕 바로밑 공간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도 공기가 충분히 돌아나가고 불필요한 습기가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건물을 서남향으로 배치,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적인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건물 내부 바닥엔 숯 횟가루 소금 등을 뿌려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막아내고 있다. 2, 3중의 안전장치를 통해 통풍과 습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다. 자연에 의지하고 귀의하면서도 자연을 극복해낸 신비의 건축물 팔만대장경판전. 그 비밀은 결국 자연과 인간, 정신과 기술의 조화였던 셈이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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