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유형원]『민생떠난 학문은 공허』

  • 입력 1997년 12월 27일 07시 17분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군자되기를 자부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공부에 힘쓰고 과거를 거쳐 벼슬에 나서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선비들의 평범한 목표였다. 과거와 벼슬을 마다하고 스스로 낮은데로 임해 민본을 실천하려 한 경우도 있었다.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1622∼1673)이 바로 그런 선비였다. 유형원은 별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양반이기에 누리는 자신의 생활을 깊이 반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나 고통받는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하는 유식자들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가 권유하는 벼슬도 사양했다. 과거해서 벼슬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대접을 못받고 생활수단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였기에 그의 결단은 비장한 것이었다. 벼슬만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생활 자체를 그만두고 온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부안땅으로 낙향해버렸다. 피폐한 농업 농민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진정한 선비의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학문방법도 보통 선비들과는 사뭇 달랐다. 선비라면 으레 저명한 유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가르침대로 따라 배우고 자신도 후배들에게 그대로 되풀이 하는 공부, 그렇게해서 시문(詩文)을 익히고 과거하고 벼슬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었지만 유형원은 여기에 따르지 않았다. 유교 경전과 선학들의 글을 스스로 깊이 연구하여 그 의미를 깨치고 이를 실제의 현상 사물과 연결시켜 이해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인간과 사회의 이치, 배운 자와 다스리는 자의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기변혁을 시도하여 주체적인 눈으로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지식인이 된 것이다. 유형원의 나이 15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그도 피란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가의 권위와 질서는 이즈러지고 농민생활은 극도로 피폐하였다. 유형원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보면서 정치를 올바로 이끌지 못한 무능한 양반을 비판하고 진정한 선비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객관적 실제적인 학문을 터득해나갔다. 그리고 잘못된 국가법제를 전면 개혁할 자신의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을 작성하게 되었다.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그의 개혁방안이 풍부한 고증과 함께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개혁의 출발점은 역시 토지제도에 있었다. 경제의 원천인 토지가 직접 농사짓는 농민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공전제(公田制)의 실시였다. 많은 농지를 소유한채 놀고 먹는 지주가 없도록 하며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민이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농민의 생업을 보장하는 위에서 서민들도 교육의 혜택과 관리로 진출할 기회를 주는 관학제도와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하도록 했다. 공거는 여러해 동안의 학업과정을 거치면서 학과목은 물론 인품 재능도 시험하는데 이를 모두 통과해야만 관직에 오르는 제도였다. 지방여론과 학우들의 평판을 듣고 교수 수령의 추천을 받는 등 자질과 능력의 검증이 철저하며 추천자의 책임이 무거웠으므로 유능한 인재가 아니면 통과하기 어려웠다. 몇차례의 필답고사나 구두시험으로 치러지던 과거시험보다는 정말 좋아질 것이었다. 또 이렇게 되면 가문을 앞세우는 종래의 양반은 사라지고 능력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정착될 일이었다. 한편 노비 신분세습 폐지, 농업 증진, 유통질서와 화폐제도 확립 방안도 마련하였다. 그밖에도 세금징수와 재정운영 정치군사제도 지방행정체계 공직자 봉급체계 등 여러 문물제도를 새롭게 고치도록 했다. 이 개혁안은 당면한 현실의 폐단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구체적인 방안과 목표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여러 개혁론을 두루 검토하여 양란후 조선사회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북벌을 위해서도 절실한 방안이었다. 그대로 실행한다면 우선 농민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국가재정이 충분해지는 등 부국강병이 절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당시 무기력하고 안목이 부족한 정부와 지도층, 특권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양반들 탓이었다. 그래도 유형원은 자신의 개혁방안이 실행가능한 것이며 그 성과가 대단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기득권 세력이 완강하게 반대하더라도 국왕과 대신은 이에 굴하지 말고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사회정의는 세력의 강약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 여부에 있다는 그의 강한 믿음과 의지력이 돋보인다. 국가와 민생을 먼저 생각하는 유형원의 학문자세와 개혁정신은 후배들에게 계승되고 더욱 발전하였다. 「반계수록」의 진가를 알아보는 실학자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등장한 것이었다. 정제두(鄭齊斗) 양득중(梁得中)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당쟁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탕평정치를 앞장서서 추진하였으며 농업과 농민경제는 말할 것 없고 상공업을 일으키는데 힘썼다. 그가 직접 가르친 제자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지지자와 계승자를 얻은 셈이었다. 당시의 통념으로 보면 유형원은 과거와 벼슬에서 멀어져 농촌에 숨어버린 소외자였다. 하지만 결코 소외자나 국외자의 인생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선비의 길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지도층이 해야할 일,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과감히 수행할 수 있었다. 크게는 국가재조의 방략을 집대성했으며 작게는 북벌군 출동 소식이 있길 기다리며 자기집 하인과 동네 장정들을 모아 무술을 익히고 병장기를 수습했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국난의 시기에 당당히 대처한 용기있는 선비, 실천을 앞세우는 지성인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김준석<연세대교수·한국사> ◇약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 「조선전기의 사회사상」 「17세기 정통주자학파의 정치사회론」 「조선후기의 당쟁과 왕권론의 추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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