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선비론/김인후]현실의 좌절 詩로 승화

  • 입력 1997년 10월 13일 08시 04분


「남쪽에는 하서」. 16세기 도학의 거봉 하서 김인후를 일컫는 말이다. 나이 다섯살때, 누군가 「하늘 천(天)」을 주제로 글을 지어보라 했다. 주저없이 곧 읊기를 「형체는 둥글어라/하 크고 또 가물가물/넓고 넓고 비어 비어/지구 가를 둘렀도다/덮어주는 그 중간에/만물이 다 들었는데/이 땅 사람이 어찌하여/무너질까 걱정했지」. 이처럼 하서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남긴 작품만 무려 1천6백여편. 그러나 그의 시성(詩性)은 그저 개인적 천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호남 강호가도(江湖歌道) 시단의 독특한 미적 정서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분을 함께 표출했기에. 하서가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 것은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속세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칩거하면서부터. 인종 승하 이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고향집 뒷산에 올라 술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다. 「그대 나이 삼십이 되어가는데/내 나이는 서른이라 여섯이로세/새 즐거움 반도 다 못 누렸는데/한번 이별 활 시위에 화살 같아라/내 마음은 돌이라서 굴러갈건가/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한창때 해로할 이 잃어버리고/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 희었네」. 인종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생각한 바 있어(유소사·有所思)」의 한 대목. 인종이 떠나간 세상, 뒤틀린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하서는 취흥으로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시종 격을 잃지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현실의 좌절감을 흥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라 부른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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