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선비론/남명 조식]복권 기다리는 「남명학」

  • 입력 1997년 9월 29일 08시 02분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림파, 즉 남명학파의 사상세계는 그동안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이는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의 비극적 생애와 깊은 관계가 있다. 민본정치사상으로 무장했던 정인홍은 광해군대 개혁세력인 북인의 우두머리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가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정치가」라고 칭했을 정도. 영의정이었던 정인홍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집권하자 보수파 서인들에 의해 비판의 초점이 되고 89세의 나이로 참형을 당한다. 광해군 당시 개혁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서인들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정인홍이 무참히 희생되자 남명학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의도적인 왜곡과 폄훼가 이뤄졌다. 이후에도 새로운 개혁세력은 정치적으로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같은 상황에서 남명 조식의 사상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인조반정 이후 역사의 뒤틀림이 남명학 왜곡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밖에 △남명이 수시로 왕가(王家)와 훈척(勳戚)들을 질타함으로써 많은 적들이 생겨난 것 △남명이 너무 고상하고 신기한 행동을 즐겨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이인기인(異人奇人) 취급하며 올바른 평가를 외면했던 퇴계와 율곡 문하생들의 시각 등도 왜곡의 또다른 배경. 지리산의 산천재에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라고 써놓고 학문에 매진, 진정한 선비의 길을 걸었던 남명. 수제자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학문과 정신이 부당하게 평가절하돼야만 했던 남명. 4백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극으로 남아있다. 이제 남명학연구는 정인홍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에서 첫걸음을 떼어야 할 것이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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