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선비론/남명 조식]「학문 외길」道學의 거봉

  • 입력 1997년 9월 29일 08시 02분


영남 동북쪽 예안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70)과 서남쪽 산청의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72)은 16세기를 살았던 도학(道學)의 두 거봉이다. 특히 조선시대 선비의 표상인 남명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 엄격한 수양으로 맑은 심성을 다듬었고 그 의리는 천길 절벽처럼 우뚝한 기상을 세웠다. 현재의 경남 합천 삼가에서 태어난 남명은 일찍부터 강인한 의기(義氣)를 지키고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썼다. 18세때 물 한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밤새도록 서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하니 굳은 의지를 연마하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항상 허리에 「성성자(惺惺子)」라 일컫는 방울을 차고 「경의도(敬義刀)」라는 칼을 턱 앞에 받쳐두어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경(敬)의 수양공부에 시종일관 매진하였다. 학문에 뜻을 세워 성리학에 한창 정진하던 25세 무렵, 공자 주자의 초상을 손수 그려 모셔놓고 아침마다 절하였으니 옛 성현을 공경하고 전통을 따라 학문하던 그의 곧은 정신에 경건함을 느낄 따름이다. 그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훈구파 집권세력의 손에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일찍부터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과거시험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처사(處士)로서 평생을 초야에서 마칠 것을 결심하고 의롭지 못한 권력이 지배하는 정부에 나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뜻을 세웠다. 30, 40대 김해의 신어산(神魚山) 아래로 옮긴 남명은 학덕이 널리 알려져 참봉(參奉)벼슬이 내려왔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온 당대 성리학의 석학인 이언적(李彦迪)이 그의 명망을 듣고 만나길 청했지만 그는 벼슬길을 나가 있는 사람과 만날 뜻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만큼 산림에 파묻혀 학문하는 고고한 선비로서 출처(出處)에 엄격한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그후 50대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몰려드는 후학들을 가르쳤다. 55세때 현감이 제수되자 명종에게 올린 사직상소에서 「전하의 국사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무너졌으며 천의(天意)는 이미 저버렸고 인심은 이미 떠났습니다」라 하여 당시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수렴청정 아래 척신(戚臣)들의 집권으로 정치가 붕괴된 실상을 통렬하게 지적하였다. 나아가 그는 「자전(慈殿)은 생각이 깊지만 궁중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려서 다만 선왕(先王)의 뒤를 이을 한 고아일 뿐입니다. 천재(天災)는 백천가지로 닥치고 인심은 억만가지로 갈라지는데 어떻게 당해내고 어떻게 거두겠습니까」라 하여 왕대비와 임금이 나라의 위기를 바로잡을 능력이 없음을 서릿발같이 천명하였으니 임금에게도 두려움없이 직언하는 그의 강개(慷慨)한 의기와 굽힐 줄 모르는 지절(志節)을 엿볼 수 있다. 이순(耳順)의 나이, 그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땅으로 옮겨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만년까지 강학(講學)과 저술에 힘썼다. 산천재라는 이름은 「주역」에 나오는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남이 날로 새롭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지리산처럼 굳세고 천왕봉 위에 걸린 태양처럼 빛나도록 덕을 닦고 학문을 연마했던 것이다. 명종 말년 훈구세력이 무너지고 임금이 상서원(尙瑞院) 판관으로 그를 부르자 처음으로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정치와 학문의 도리를 제시하여 선비로서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9일뿐, 벼슬을 사퇴하고 귀향했다. 이어 선조 초년 선비들이 정치를 담당하는 사림정치시대가 열리게 되자 임금은 퇴계 남명 등 당대의 석학들을 거듭 간곡히 불렀지만 그는 상소를 올려 왕도정치의 이상을 제시했을 뿐 결국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이 취한 학문의 핵심과제는 마음을 각성하는 경(敬)의 수양론과 의(義)의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을 추구하는 의리론이었다. 그가 산천재의 창쪽 벽에 「경의(敬義)」 두 글자를 크게 써붙이고 오른쪽 벽엔 「임금은 사직을 지키다 죽어야 한다(國君死社稷)」는 내용의 「신명사도명(神明舍圖銘)」을 걸어두었던 사실은 그의 학문적 근본개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명의 높은 학덕을 사모하여 그의 문하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오건(吳健) 정술(鄭述) 김우옹 등은 당대의 대표적 학자였고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은 스승 남명의 의기를 이어받아 임진왜란동안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다. 남명은 만년에 자신이 수양하는데 쓰던 방을 김우옹에게, 칼을 정인홍에게 주고 전심(傳心)하는 징표로 삼았다 한다. 특히 정인홍은 남명의 수제자로서 학문과 수양에 각고의 노력을 하여 명망이 높았고 광해군대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북인세력의 영수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컸었다. 그러나 인조반정후 광해군의 혼정(昏政)에 따른 죄명으로 정인홍이 처형되면서 남명의 학통까지 붕괴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렇지만 영남의 동남쪽을 중심으로 남명의 의리와 학문적 영향력은 면면히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광해군때 영의정에 추증됐고 산청의 덕천서원을 비롯하여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암서원 등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금장태<서울대교수·종교학> [필자 약력]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성균관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성균관대교수 역임 △저서 「한국실학사상 연구」 「한국근대사상의 도전」 「유학사상의 이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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