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⑧]변화하는 하와이 교민사회

입력 1998-03-03 20:15수정 2009-09-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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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에….’

하와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한인들의 꿈은 큰 돈을 벌어 그리운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일념이 하루 10시간이 넘는 사탕수수 농장의 중노동을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보호조약(1905년)과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조국의 암울한 정치상황은 이들의 희망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이런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듯 하와이 한인들이 초기에 노동대우를 개선하기 위해 조직한 각종 단체들은 차츰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탈바꿈한다. 돌아가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조국광복이 ‘발등의 불’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는 어떤 단체든지 조국광복운동 후원을 그 행동강령으로 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상당한 신도를 확보한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시대 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던 이동진(李東鎭)목사는 “순수한 교회활동과 애국활동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목사는 “당시 이를 지켜본 미국인 교회감사가 ‘다 좋은 일이지만 교회활동과 애국활동은 구분해달라’고 주문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기 위해 정치적 사회단체를 조직, 동포들의 힘을 결집하는 동시에 독립운동 자금지원에 발벗고 나선다.

이들은 피땀흘려 모은 독립자금 3만4천여달러를 만주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방전까지 3백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 그 대부분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당시 4인가족을 기준으로 최저 생활비가 30달러 정도였으니 3백만달러는 엄청난 규모였다.

당시 독립자금을 출연한 이홍기씨(74년 작고)의 아들 로버트 리(한국명 이종완)는 “어렸을 때 카우아이 케카하지역에 살았는데 아버지의 하루 일당이 1달러25센트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하와이의 물가는 비쌌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이 쌀을 제외하고는 집앞 텃밭에 콩 상추 배추 등 채소를 직접 일구며 살았다”며 “이처럼 고물가의 영향을 적게 받은 탓에 저축도 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사진결혼으로 하와이로 건너온 사진신부들의 단결력은 눈에 띄었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았고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강하게 반발했던 이들은 1919년 4월 ‘대한부인구제회’를 설립한 이후 30여년 동안 조국광복 후원의 숨은 일꾼이었다.

부인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매일 밥짓기 전에 쌀 한 숟갈씩을 저축, 이 쌀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이렇게 모은 돈이 당시 총 20만달러를 웃돌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부인들은 한인들이 자주 모이는 교회에서 떡이나 밑반찬 등을 팔아 남는 수익금을 독립운동자금이나 각종 구제자금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같은 배경에는 하와이 한인 경제의 부흥이라는 점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하와이한인경제는 세계 제1차대전(1915∼1920년) 발발로 전기(轉機)를 맞는다. 전쟁발발에 따른 경제 활성화로 젊은이들이 대거 전장(戰場)에 나감에 따라 일손이 달리기 시작하자 노동품삯이 급등한 것.

한인들의 사업영역도 단순 농장일에서 차츰 확대된다. 자작하거나 소작하는 한인들도 3배 정도 증가했다. 한인들은 점차 채소가게나 여관업 재봉소 외에 가구상이나 세탁소 잡화상 구두수선 등에도 진출, 재력을 쌓기 시작했다.

각종 장사를 시작한 한인들의 생활력은 끈질긴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호놀룰루에서 세탁소를 차린 한 할머니는 영어를 제대로 적을 수 없어 가게를 자주 찾는 미국 군인들의 인상착의를 일일이 장부에 그려넣은 뒤 고객관리를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현지 교민들이 전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하와이가 국방의 제1선으로 떠오르자 한인들은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며 각종 사업을 통해 부를 쌓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에는 한인들이 기금을 모아 현재 호놀룰루의 주청사 등이 들어선 노른자위땅에 2층 목조건물을 사들여 ‘국민회’건물로 사용할 정도였다. 이 건물은 1946년 주정부의 토지수용권에 의해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한편 1차세계대전 이전에 하와이 한인중 일찌감치 미 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1910년에 미국 본토로 이주한 남자는 1천9백99명, 여자는 12명이었다. 당시 하와이에 남은 한인이민자는 4천1백87명이었다.

미본토 이주는 2세들의 교육을 고려한 것도 있었지만 사탕수수 농사보다는 경험도 있고 대우도 나은 캘리포니아 쌀농사가 ‘매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는 미국의 철도건설 노동자로도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이후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하와이는 당시 민족운동의 노선갈등이 치열했던 전장이기도 했다. 민족독립운동사의 거두였던 박용만(朴容萬)과 이승만(李承晩)의 대결구도였다.

당시 ‘국민회’를 이끌었던 박용만은 무력투쟁을 통한 주권쟁취를 역설했다. 실제로 그는 1914년6월 오아후섬 산너머에 국민군단을 창설하는 등 군사력배양에 전념한다.

반면 이승만은 무장봉기론을 강력히 비판하며 국제적 외교노력에 의한 조국광복을 추구했다. 이른바 ‘무혁명반항’이라는 중용적 방법을 통해 혁명이 아니라 한민족의 결의를 대내외에 알리는 시위운동이 적절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두사람은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박용만은 1928년10월17일 오후8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의열단원의 총격을 받고 47세의 한많은 일생을 마감한다.‘국민회’와 ‘동지회’로 갈라진 박용만과 이승만의 지지세력은 아직까지 과거의 앙금을 안고 있지만 이들은 하와이를 한국독립운동사의 산 현장으로 만든 주역임에 틀림없다.

조국독립의 염원속에 인종차별과 이질적인 문화풍습의 차이를 이겨온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은 이제 제2의 도약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희망은 남은 후예들이었다.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미국에서 태어난 너희들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교육 철학이 한인1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대부분의 한인2, 3세는 고국과의 단절로 인해 거의 현지 미국 사회에 흡수된 상태다. 한국어도 잊고 생활문화도 1세때와는 다르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정신은 이들의 마음에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현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의 후예중 하와이주 대법원장인 문대양씨(미국이름 로널드 문·57).

초기이민 3세인 그는 아이오와 주립대를 졸업한 후 66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순회 항소법원 판사를 거쳐 90년 주대법원 판사가 된 뒤 93년3월 임기 10년의 주대법원장에 선임됐다. 그는 항상 아버지 문덕만씨의 “평소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해왔다고 말했다.

문대양씨처럼 현재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인3세 법조인은 50여명에 달할 만큼 많다. 인구비율로 따지면 단연 최고라는 것. 이외에도 정재계에 진출한 한인2, 3세가 적지 않다.

사탕수수 농장의 한을 품은 하와이 한인들의 후예는 선조처럼 이제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호놀룰루(하와이)〓정연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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