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나에게 왔던 사람들은 모두 부서진 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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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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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뷰티 퀸’
대본 ★★★★☆ 연기 ★★★★☆

마흔 넘도록 처녀로 늙어가는 모린(김선영)과 생존을 위해 그 딸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으려는 칠순 노모 매그(홍경연). 두 모녀의 슬픈 투쟁을 그린 연극 ‘뷰티 퀸’. 사진 제공 노네임씨어터컴퍼니
마흔 넘도록 처녀로 늙어가는 모린(김선영)과 생존을 위해 그 딸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으려는 칠순 노모 매그(홍경연). 두 모녀의 슬픈 투쟁을 그린 연극 ‘뷰티 퀸’. 사진 제공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그렇게 시작하는 황지우의 시 ‘뼈아픈 후회’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연극이다. ‘필로우맨’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도 활약 중인 영국 극작가 마틴 맥도너(40)의 처녀작 ‘뷰티 퀸’.

아일랜드 빈촌의 산동네 오두막집 거실이 극의 무대다. 동네 미인대회 출신이지만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남자 둘과 키스해 본 게 연애 경험의 전부인 모린(김선영). ‘아무도 사랑해 본 적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란 시구가 딱 어울리는 여인이다.

그는 칠순 노모 매그(홍경연)를 돌보며 산다. 위의 두 딸을 시집보내고 막내딸 모린에게 의지해 연명하는 매그는 이기심의 화신이다. 자신의 병 수발 다 들어주는 모린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노처녀 딸이 자신을 버리고 시집갈 게 두려워 모린에게 남자가 생길까 늘 노심초사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그가 머문 자리는 모두 지린내 진동하는 폐허가 되고 만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다투던 모녀에게 진짜 큰 사건이 발생한다. 매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모린의 고교 남자동창 파토(신안진)가 모린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 다음 날 아침 모린과 매그는 그런 파토 앞에서 서로의 치부를 경쟁적으로 폭로하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한국에선 신성불가침적인 모녀관계가 이 작품에선 저주받은 관계로 그려진다. 아일랜드인들의 치부도 거침없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고인다. 가장 원초적 인간관계를 파괴한 배후에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 사회의 차별과 폭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웃음과 눈물이 섞인 블랙 코미디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계인 맥도너가 이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극작가로 급부상하게 된 이유다.

이현정 연출의 혹독한 조련 아래 4주나 전막연습을 펼쳤다는 네 배우의 앙상블이 뛰어나다. 특히 대사와 대사, 표정과 표정 사이의 여백을 고밀도의 감정으로 채워 넣는 김선영의 연기가 일품이다. 파토의 철없는 동생으로 공연 내내 주변인물로 겉돌다 막판 극적 반전을 몰고 오는 레이(김준원)는 숨겨진 보물이다. 2만5000원. 2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Space111. 02-744-401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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