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에세이/권성원]‘전립샘 전도사’의 고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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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원
“내 전립선이 달걀만 하뎌.” “수술 안 해도 된뎌.” “방송에 나오는 교수님들이 다 모였당게!” “별의별 검사를 다 했지라우.” “이런 게 대학병원이구먼!”

왁자지껄 모두가 희희낙락합니다. 지난 주말 전북 두메산골 장수에서 벌인 23번째 전립샘 무료 진료 행사장 풍경입니다. 사방 100km 안에 대학병원급 진료 기관이 없는 벽지만을 찾아 헤맨 지 10년, 전남 고흥에서 시작해 해남, 신안, 순창, 고창, 거창, 거제도, 안면도, 봉화, 청송, 영양, 정선, 영월…. 지독한 역마살입니다.

의료진은 백발이 성성한 학계 원로 교수들입니다. 전직이든 현직이든 학장, 원장, 학회장을 거친 분들입니다. 1년에 2, 3번씩 전국을 누비며 전립샘 질환으로 오줌을 못 누는 노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진정한 ‘재능 기부’의 모델로 자부합니다.

10년째 전국 두메산골서 무료 진료

전립샘 질환은 노년 남성들의 천적입니다. 배뇨장애의 주범인 전립샘비대증은 60세 이상 60%, 70세 이상에서는 70%입니다. 이렇게 빈도가 높은 병은 없습니다. 배뇨장애, 성기능, 변비 같은 ‘아랫동네 병’은 아내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말하기 힘듭니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이부자리를 적시고 소변 한번 보려면 몇 분씩 뜸을 들이고 오줌이 겁나 관광버스도 못 타면서 무지와 체념으로 견디어 냅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에서 전립샘비대증쯤은 병도 아닙니다. 과거 수술에만 의존하던 치료도 이제 약물요법으로 거뜬합니다. 오줌발을 좋게 하는 약들, 방광을 편하게 안정시키는 약들, 커진 전립샘을 줄이는 약들이 줄을 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구에서는 남성암 1위(한국은 5, 6위권)인 전립샘암도, 조기 진단만 하면 ‘완치’란 말을 쓸 정도로 치료가 발전하고 암이 콩알만 하게 시작할 때부터 잡아내는 간단한 진단법도 등장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각국 비뇨기과 학회에 무지와 체념으로 고생하는 노년층에게 홍보를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정부도 협회지라도 만들어 전립샘 질환에 대한 계몽과 올바른 정보를 전해달랍니다.

그래서 저는 ‘전립선’이란 계간지를 발행해왔습니다. 칼잡이 의사가 해본 적도 없는 편집, 교정, 인쇄도 힘든데 편집 후기를 써라, 칼럼을 써라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격다짐으로 시작한 게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보는 잡지라 글씨도 크게, 종이도 좋게 하다 보니 책이 무거워 발송비(권당 1080원)도 꽤 듭니다. 매호 7000∼8000부씩 지금까지 28만 부를 펴내 무료로 배포했는데 한마디로 진땀의 연속이었습니다. 7, 8년 동안 힘은 들었지만 전국의 두메산골을 찾아다니면서도 휴간 없이 펴냈습니다. 그 덕분에 ‘전립샘 전도사’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여기에 전국 두메산골을 찾아 100여 명의 의료진, 간호사, 장비기술진, 자원봉사자들이 움직이고 대학병원급의 장비를 수송하다 보니 경비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세상은 ‘예스’여서 많은 국내외 제약기업들이 후원을 해왔습니다. 손주를 둔 꼰대 교수들이 나서는 게 신통하게 보인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사, 언제나 쾌청할 수만은 없는 모양입니다.

2년 전부터 정부가 그동안 횡행하던 리베이트 관행을 뿌리뽑아 건강보험 재정을 살리겠다고 나선 뒤 엉뚱한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나랏일이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두메산골 노인들에게 보내는 약품들이 ‘리베이트’란 오해를 받았습니다. 각 학회가 내는 학술지의 광고료도 의심을 받아 상한가가 정해졌습니다.

잡지 ‘전립선’에 실리는 광고료도 3분의 1로 동강났습니다. 휴간이냐 폐간이냐, 갈등 속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더 힘든 것은 10년 넘게 온 나라 두메산골을 헤맨 우리 꼰대 교수들의 자존심이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겁니다. 뇌물집단으로 여겨질 바에야 조용히 해산하자는 탄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제약사 약품 후원 끊겨 중단 위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 들어 일제히 약값을 내리니 제약업계가 몸살을 합니다. 감원을 하고 연구개발까지 뒤로 미루는 판에 봉사단체 후원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기업하는 친구들이 힘내라고 광고를 주고 제가 살려낸 환자들이, 봉사의 상징인 로타리 회원들이 돕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종이의 질도 내리고 발행부수도 줄여가면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버텼습니다. 전문 작가도 아닌 칼잡이 의사가 그동안 잡지에 칼럼으로 쓴 글들을 모아 ‘아버지 마음’이란 책도 펴냈습니다. 글 자랑하기 위해서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네댓 권 팔면 오줌 못 누는 어르신 한 분을 웃게 만들 수 있거든요.

지난 주말 장수에서 만난 어르신 500여 명이 모처럼 완벽에 가까운 진료를 받고 모두가 파안대소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 꼰대 교수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봉사 끝내면 피곤해도 마음은 깃털

자원봉사라는 게 묘합니다. 중독성이 강합니다. 봉사를 끝내면 몸은 파김치인데 마음은 깃털입니다. 뒤풀이 술 한잔에, 소금에 절인 배추같이 의기소침하던 우리 꼰대들의 기가 살아납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내년에도 역마살을 이어 가잡니다. 사는 날까지 두메산골을 찾아 가잡니다. 천지신명께 이렇게 빌어봅니다. 부디 이 착한 꼰대들을 어여삐 보아 주십사하고 말입니다.

: : 권성원 씨는 : :

연세대 의과대를 거쳐 30여 년을 이화여대 의과대에서 일했다. 일본 니혼대 의학부에서 레이저의학, 독일 뤼베크 의대에서 내비뇨기과학, 스페인 바르셀로나 의대에서 영상비뇨기과학을 연수해 첨단비뇨기과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2005년부터 차의과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1년 한국전립선관리협회장직을 맡아 전립샘 치료의 사각지대인 두메산골을 누비며 무료진료를 해온 공로로 2005년 보건의 날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권성원
#전립샘#노년 남성#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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