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경쟁력] 미사리에 뉴욕을 짓고…일본에 한국 간이역을 만들고…

  • 입력 2009년 2월 1일 09시 06분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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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의 경쟁력-21] CF미술감독 김지은의 '무대뽀'

"뭐라고? 미사리에 뉴욕을 만든다고?"

CF 미술감독 김지은(31) 씨가 "뉴욕에 갈 수 없다면 한국에 뉴욕을 만들자"고 말을 꺼내자 제작진은 모두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를 잘 아는 김종원 총 감독만 혼자 "그래라", 짧게 한 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을 뿐이다.

2006년 여름 르노삼성자동차의 SM5 김혜수 편을 촬영할 때의 일이다. 김혜수가 탄 SM5 뒤로 행인들이 오가는 뉴욕 거리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CF의 컨셉트였다. 광고주가 뉴욕 현지 촬영을 원했지만 출연진과 스태프의 일정이 맞지 않아 불가능해졌다. 대부분의 제작진은 체념한 채 장소와 일정의 조정만 기다리던 때였다.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다면 넓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주차장에 뉴욕 거리를 재현하자는 김지은 감독의 제안에 스태프들은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다. "장마철인데" "페인트 칠은 어떻게 하려고" "강풍이 불 텐데 세트가 가능하겠느냐"….

묵묵히 듣던 김 감독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면 돼요."

세트 완성 데드라인까지 남은 시간은 7일. 김 감독과 스태프들은 그때부터 비와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잠깐 날이 개면 페인트칠을 하고 다시 비가 오면 비닐을 덮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비닐 걷기와 덮기를 반복하며 페인트 작업을 완성했다.

'하면 된다'는 그의 에너지는 전염력이 강했다. 스태프들은 점점 열성적으로 변해갔고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에도 유리창 공사를 하겠다고 덤비는 바람에 김 감독이 나서서 공사를 중단시키고 유리를 반품시킨 뒤 아크릴로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7일 만에 미사리 주차장에 뉴욕 거리가 나타났다.

● '알카라인' 못지않은 에너자이저

2002년부터 CF 미술감독으로 활동해온 그는 경력은 길지 않아도 작품 목록이 짱짱하다. 르노 삼성 자동차 SM5 김혜수편, 국민은행 김연아편, 배스킨라빈스31 드류 베리무어편, 삼성 애니콜 토크, 플레이, 러브 등 400여 편의 미술감독을 맡았다. 대한민국 광고대상 금상(삼성 애니콜 가로 본능), 은상(CJ몰), 뉴욕 페스티벌 본선진출(LG화재 매직카, 다음) 등으로 주목받는 CF 미술감독으로 떠올랐다.

CF 미술감독은 정해진 일정 내에서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소화해 내야 한다. 어지간한 근성이 아니고서는 버텨내기 힘들다. 또 디자이너들 뿐 아니라 현장 작업자들과도 어울리며 때로는 텃세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에겐 힘든 직종"이라는 게 그간 남자들의 통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저는 혈액형이 O형이에요, 별자리는 황소자리이고, 띠는 말띠…, 이 정도면 다 갖췄죠?"(웃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오래 가는 건전지를 앞세운 광고를 빗대어 '알카라인'이라고 부른다. 추진력 강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뜻에서다.


▲정주희 동아닷컴 기자

●일본에 지은 '장곡리역'

맥스웰 조인성편 광고를 촬영할 때에도 김 감독은 자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 광고는 막차를 놓친 두 남자가 커피를 함께 마시며 히치하이킹에 나선다는 게 주요 내용.

광고의 배경으로 아담한 시골 기차역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국에는 KTX 역처럼 큰 역이나 너무 낡은 간이역 밖에 없었다. 적당히 작고 낡았으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소규모 역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일본으로 건너가 완행열차를 타고 모든 역에 내려 하나하나 후보지를 물색했다.

하지만 "일본에도 그런 역은 없다"는 게 당시 스태프들의 판단. "CF 제작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다시 서울로 가자"는 총감독의 말에 김 감독은 이렇게 대꾸했다.

"아까 본 역 하나를 리모델링 하면 광고 컨셉트에 맞는 기차역을 만들 수 있어요. 3일만 주세요."

김 감독은 3일간 일본 철도 JR 산코선의 '가와히라역' 건물에 나무로 가벽을 만들어 새로 칠하고 일본어로 적힌 각종 안내판을 가려 실제 있지도 않은 '장곡리'라는 역을 만들어냈다.

안되면 되게 하는 에너지로 밀어붙이는 일이 "익사이팅"해도 에너지는 퍼다 쓰기만 하면 곧 고갈되는 법. 그는 "담는 것 없이 내뱉기만 해서는 수명이 길지 않다"는 고민 끝에 2006년 회사를 나와 디자인 업체인 '아뜰리에'를 차려 독립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그가 마련한 '아뜰리에&프로젝트'는 어찌 보면 정체불명인 공간이다. 디저트 연구가인 대학 동창 백오연(31)씨, 패션 큐레이터인 초등학교 동창 박지연(31)씨와 함께 운영하는 이 공간은 카페인 동시에 김 감독의 작업공간, 때로는 재즈 연주가 열리는 공연장으로도 변신한다.

"추진력 있게 일을 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이 곳은 말하자면 저의 에너지 충전소인 셈이죠."

아무데서나 주워다 놓은 듯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질서가 있다. 테이블 사이에는 박씨가 디자인한 옷과 신발이 판매용으로 전시돼 있고 한쪽 구석에서는 백씨가 요리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한 쪽 구석은 김 감독의 작업실.

"이런 장소가 있으면 사람들과 에너지를 나누고 때로는 같이 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두 친구를 설득했어요."

실제로 이 곳에서는 꽤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우연히 들른 재즈 연주가들이 수시로 악기를 들고 와 즉흥적으로 차를 마시러 온 손님들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이 곳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면서 그림 한 장 던져 주고 자리를 뜨는 미술가, '이곳과 같은 분위기의 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프랑스인…. 이들은 모두 김 감독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주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는 CF 감독 외에도 촬영 출장을 다니면서 찍어 둔 사진으로 '아뜰리에 BOOK'이라는 책을 준비 중이며 지난해 '여행을 컬렉션하다'는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 평가에 따르면 그는 해야 할 일을 밀어 붙이는 에너지 뿐 아니라 "안 해도 되는 일 찾는 데에도" 에너지가 넘친다.

김 감독이 스스로 생각하는 '업계 랭킹'은 몇 위 쯤 될까?

"글쎄요, 제가 몇 등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저 사람은 에너지가 넘치는 선배다, 후배다'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런 열의를 전달해서 함께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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