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월 다섯째주

  • 입력 2004년 1월 25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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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2월 19일 비공개 총살되기 직전의 정국은. 사형 집행이 석연치 않게 연기된 데다 ‘공개 처형’ 방침이 갑자기 ‘비공개 처형’으로 바뀌는 등 갖가지 혼선 때문에 정부의 공식발표 뒤에도 ‘그가 진짜 죽었느냐’는 의혹이 계속 일자 정부는 관련 사진을 기자들에게만 공개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54년 2월 19일 비공개 총살되기 직전의 정국은. 사형 집행이 석연치 않게 연기된 데다 ‘공개 처형’ 방침이 갑자기 ‘비공개 처형’으로 바뀌는 등 갖가지 혼선 때문에 정부의 공식발표 뒤에도 ‘그가 진짜 죽었느냐’는 의혹이 계속 일자 정부는 관련 사진을 기자들에게만 공개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迷宮 속의 鄭國殷 … 死刑執行 豫定時間 前에 突然 報道管制▼

고등군법회의에서 적색국제간첩으로 낙인을 찍힌 鄭國殷에 대한 총살형 집행 여부는 그 집행예정일이던 지난 二십三일 이래 돌연히 실시된 ‘보도관제’로 말미아마 아직 것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은 채 항간에 구구한 억칙만을 퍼뜨려주고 있다.

계사년을 뒤집어엎었던 鄭國殷사건은 이제 다시 그 총살형 집행 여부를 둘러싸고 일반의 관심을 송두리 채 집중시키고 있는데 이하 ‘사형수 최후의 날’로 알려졌던 지난 二십三일 이래 鄭國殷에 대한 형 집행 여부를 둘러싼 표정의 이모저모… 국방부 보도과 직원 전원 鄭國殷에 대한 총살형 집행에 관하여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고 다만 칠판에 적힌 ‘긴급보도관제’라는 흰 글짜를 손질할 뿐으로 “鄭國殷에 대한 형 집행은 중지나 연기도 아니며 실시도 아니고 다만 별도로 일체 언급할 수 없다”는 지시사항에 아침부터 보도과에 모여들었던 각사 기자들은 더욱 더 갈팡질팡…

<1954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에서>

▼6·25이후 첫 간첩 ‘鄭國殷’ 처형놓고 억측난무 ▼

‘정국은 사건’은 6·25전쟁 이후 ‘제1호’ 대형 간첩사건이다. 정국은은 1953년 8월 31일 체포될 당시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주필을 겸임했던 유력 언론인. 그가 ‘북한 노동당의 간첩’으로서 국방부를 무상출입하며 기밀을 탐지하고 정치인과 결탁해 정부 전복을 꾀했다니 분명 경천동지할 뉴스였다. 정치적 파장은 더욱 컸다. 이재형 상공, 진헌식 내무, 신중목 농림장관이 정국은과 가깝다는 이유로 파면 또는 재판에 회부됐다. 연합신문 발행인이던 국회의원 양우정도 구속된다. 양우정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꼽혔다. 이들 4명은 모두 철기 이범석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계열. 이들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도모한 52년 부산정치파동에 앞장선 공로로 당정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국은 사건으로 족청계 의원 16명이 모두 당에서 제명돼 궤멸한다. 이 대통령이 족청계의 세력 확대를 경계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 그 뒤 비족청계인 이기붕이 2인자로 부상한다. ‘토사구팽’의 의혹이 짙다. 이 사건은 54년 1월 23일 정국은의 사형 집행 발표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기사에서와 같이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며칠 만에 관심사로 재등장했다. 그는 결국 2월 1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구구한 억측은 계속된다. 그가 정말 간첩이었는지, 또 사형 집행은 왜 그렇게 오락가락했는지 죽은 자는 아무 말이 없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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