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월 넷째주

  • 입력 2004년 1월 18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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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급격한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쌀값만은 유독 통제가 심했다. 광복 이후 농촌에서의 쌀 공출. -‘서울 20세기’ 자료사진
광복 이후 급격한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쌀값만은 유독 통제가 심했다. 광복 이후 농촌에서의 쌀 공출. -‘서울 20세기’ 자료사진
▼農村과 理髮料▼

요즈음 理髮料金이 인상되어 쌀 한되 값과 맞서게 되었다. 理髮業者의 强請에 못 이겨 官에서 인상을 승낙한 것인데 쌀값의 低落에서 오는 農民의 生活苦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쌀 한되라야만 머리를 한번 깎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일이다. 쌀 한되를 生産하려면 一년이 걸려야만 하는데 六十환 理髮料는 三十分間의 所得이 된다. 그런데 (…) 農家의 所得을 따져보면 償還穀과 收得稅를 다 除하고 나면 한 톨의 쌀도 남지 않는데 두 달이 못가서 춘궁기가 닥쳐온다. 우리는 담배 값이 오른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理髮은 하지 않으면 出入을 못하는 고로 한달에 한번씩은 이발을 해야만 하는데 위선 먹을 것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한달에 쌀 두되 이상(五人 食口인 경우)을 내고 살 수 있겠는가.(呻吟生)

<동아일보 1954년 1월 23일자에서>

▼쌀 1되 팔아선 이발도 못해…농민시름 여전 ▼

쌀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에겐 실질적인 화폐였다. 정승의 녹봉이 쌀이었고, 머슴의 새경도 쌀이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쌀값의 교환가치는 나날이 떨어졌다.

기사의 독자편지에서 이발료 60환이 쌀 한 되(1.8L) 값과 같다는 사실에 통탄하는 이유는 당시의 농촌 현실과 관련이 깊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광복 직후만 해도 이발료는 2.88원, 쌀 한 되는 12.4원이었다. 그 뒤 유독 정부의 통제를 심하게 받아 온 쌀값은 1954년 드디어 이발료와 같아지기에 이른 것.

현실은 이 같은 수치보다 훨씬 열악했다. 전쟁 뒤 대부분의 농가는 수확량의 30%에 이르는 상환곡과 약 8%의 수득세, 이 밖에 30∼50가지의 잡세 등으로 심하게는 수확량의 절반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 모든 세금을 시중가격의 20∼50%로 쳐서 현물로 걷어갔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 이호철 교수는 “당시 정부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농가 세금을 현물로 받을 것을 고집했다”며 “이는 전쟁 피해를 인구의 80%나 되는 영세농가에 전가한 것으로 이때부터 농촌의 몰락은 예고됐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요즘 쌀 상품 80kg은 16만∼18만원선. 이를 한 되로 환산하면 4000원이 채 안 되는 반면, 오늘날 대중이발소에서 이발만 하는 요금은 5000원 정도.

오늘날 쌀값과 농촌이 천덕꾸러기가 된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쌀값이 외국과 비교해 5, 6배 비싸다는 지적을 받으며 수입개방 압력 앞에 풍전등화 신세가 된 것. 예나 지금이나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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