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 피말리는 승부세계의 감독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8일 1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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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은 선수 대기실이었다.

1990년대 초 한 프로축구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날 작전 지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속이 부글부글 끊었던 모 팀의 A 감독. 그는 하프타임 때 선수 대기실에서 후반전 작전 지시를 하다 팀의 주축 수비수인 B 선수를 가까이로 불렀다.

뭔가 귓속말로 얘기를 할 것처럼 선수에게 바짝 다가선 A 감독은 갑자기 그 선수의 귀를 꽉 물었다. 그리고 터진 비명.

평소 점잖은 이미지에 선수들에게 손찌검을 절대하지 않는 A 감독이었지만 이날 팀의 대들보인 B 선수의 실수로 골을 빼앗기자 단단히 화가 났던 것.

어쨌든 귀를 주무르며 후반전에 나선 B 선수는 수비는 물론 전 선수들을 진두지휘하며 팀을 역전승으로 이끌었다.

'신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온화하고 자상한 A 감독도 이럴진대 '한 성질한다'는 감독들은 제대로 안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혈질 감독으로 유명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그의 '헤어드라이 요법'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헤어드라이기가 열기를 뿜어내듯 선수 면전에 대고 고함을 질러대고, 선수 대기실 바닥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차대며 불같이 화를 낸다.

이런 그이기에 시간이 나면 맨체스터 인근의 경마장을 찾는다. 경마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가끔씩 골프로 마음과 몸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선수의 귀를 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A 감독의 심신 안정법은 바둑이었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김응룡 사장. 스타플레이어로 명감독으로 마침내 구단 CEO에까지 오른 김 사장의 현역 시절 별명은 '코끼리'.

산 같은 체격에 과묵한 그였지만 감독 시절 뭔가 경기가 제대로 안 풀릴 때는 차고 있던 시계를 선수 대기실 바닥에 내동댕이치거나 의자 등을 발로 차 부셔버리며 화를 풀기도 했다.

해태와 삼성 감독으로 프로야구 사에 전무후무한 10번 우승의 금자탑을 쌓은 그는 피 말리는 승부세계를 수십 년 동안 겪은 탓에 사장이 된 뒤에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등산을 하다 최근에는 골프를 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축구대표팀의 허정무 감독. 그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바둑과 다양한 잡기 즐기기다.

바둑은 아마추어 공인 4단. 유명 프로기사인 서능욱 9단과 접바둑을 둬 이긴 일도 있다고 한다.

허정무 감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뜬 머리를 정리하는데 바둑만한 기예가 없다"며 "그러나 축구계에서는 나와 바둑을 둘 만한 상대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바둑 외에 허 감독은 당구도 '아주 짠' 300이요, 탁구도 아마추어 고수급이다. 허 감독은 지인들이나 선수들과 당구나 탁구를 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한국축구대표팀은 남아공월드컵 기간 중 베이스캠프로 루스텐버그의 헌터스 레스트 호텔에 머물 예정. 외신을 통해 공개된 헌터스 레스트 호텔을 보니 당구대를 비롯해 각종 오락기기도 잘 구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축구가 승승장구를 해서 허 감독이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당구 큐대나 탁구 패들을 잡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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