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20세기의 최고 에이스(1)

  • 입력 2002년 1월 25일 11시 20분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린 투수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는 투수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상인 사와무라 상을 여러 번 수상한 투수도 있으며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투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투수 중 '에이스'라고 부를 수 있는 투수는 과연 어떤 선수들이 있을까? 여기 통산 성적을 바탕으로 에이스의 카리스마를 지녔던 투수들을 각 구단별로 1명씩 추려보았다. 단 1990년 이전에 은퇴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스기우라 다다시(杉浦忠)

1935년생, 우투우타, 통산 187승 106패, 방어율 2.39, 1756 탈삼진, 다승1위 1회, 방어율1위 1회, 승률1위 1회, 탈삼진1위 2회, MVP 1회, 베스트나인 1회, 신인왕.

나가시마와 동기인 그는 릿쿄대학 2학년때 언더스로로 전향했다. 1958년 다이에의 전신인 난카이 호스크에 입단하여 그해 27승12패, 방어율 2.05의 놀라운 성적으로 신인왕을 따냈다. 이듬해에도 38승4패, 방어율 1.40, 336탈삼진, 9완봉승으로 투수 5관왕,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MVP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그 유명한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혼자 4승을 따내며 팀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4승 무패, 방어율 1.41의 스기우라가 시리즈 MVP를 차지함은 자명한 일. 54 2/3이닝 무실점(퍼시픽리그 기록)을 기록하기도 한 이 해 스기우라의 활약은 한 시즌을 놓고 봤을 때 사상 최고의 활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0년에도 탈삼진 수위를 차지했으며 1961년과 1964년에도 20승을 기록하였다. 그는 1961년 5월6일 니시테츠전에서 100승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첫승 이후 3년 1개월만의 기록으로 경신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기록이다. 그러나 스기우라는 오른 팔 부상으로 인해 그리 길게 선수생활을 하지 못한 채 1970년에 은퇴하였다. 1986년부터 난카이 감독을 맡았다.

이나오 카즈히사(稻尾和久)

1937년생, 우투우타, 통산 276승 137패, 방어율 1.98, 2574탈삼진, 다승1위 4회, 방어율 1위 5회, 탈삼진1위 3회, MVP 2회, 베스트나인 5회, 신인왕.

1956년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한 이나오는 예상치 못한 활약을 펼치면서 21승6패 방어율 1.06의 놀라운 성적으로 신인왕까지 거머쥐었다. 2, 3년째에도 35승, 33승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큰 기여를 한 에이스. 특히 1958년 일본시리즈 때는 팀의 3연패 뒤 혼자서 4승을 기록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5차전에서는 10회말 자신이 직접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1956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도 결승타를 뽑아낸 적이 있는 '강타자'였다. 시리즈 종료 후 한 관중이 외쳤다는 '신주님, 부처님, 이나오님(神樣, 佛樣, 稻尾樣)'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1961년에는 역대 1위인 78경기에 등판하여 스타르힌이 기록한 시즌 최다승인 42승을 다시 한번 기록하였으며 역대 2위에 해당하는 353탈삼진을 뽑아냈다. 1959년 75경기 등판, 1963년 74경기 등판 역시 역대 3, 4이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통산 756경기 등판은 역대 7위의 기록이다. 이나오는 에이스의 진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일본시리즈 통산 11승(역대 1위), 올스타전 통산 5승(역대 2위)을 기록했으며, 1957년 10월1일 마이니치전에서는 20연승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잦은 등판으로 인하여 14년만에 은퇴하였다. 200승 이상 투수를 대상으로 한 통산 승률에서 후지모토 히데오에 이은 역대 2위. 공의 구속이 아주 수준급은 아니었지만 컨트롤은 가히 역사상 최고라고 불러도 무방할 대투수였다. 1970년부터 6년간 감독을 맡았으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야마다 히사시(山田久志)

1948년생, 우투우타, 통산 284승 166패 43세이브, 방어율 3.18, 2058탈삼진. 다승1위 3회, 방어율1위 2회, 승률1위 4회, MVP 3회, 베스트나인 5회, 골든글러브 5회.

본래 내야수였던 야마다는 고교시절에 투수로 전향했으며 사이드암이던 폼을 언더스로로 바꾸고 1969년 드래프트 1위로 오릭스의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였다. 3, 4년째에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한 그는 1976년부터 3년 연속 MVP를 수상했으며 1975년부터 12년 연속으로 개막전 선발의 중책을 맡았다. (3년 연속 MVP를 받은 선수는 야마다 외에 단 한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스즈키 이치로) 한큐가 1975년부터 4년 연속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비결은 바로 에이스인 야마다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큰 경기에도 강했던 그는 1977년에는 2승, 방어율 1.80으로 일본시리즈 MVP까지 거머쥐었으며, 올스타전 7승(무패, 올스타전 총 13회 출전) 기록은 역대 최고이다. 1970년부터 17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기록한 그였지만 세월의 흐름에 어쩔 수 없는 듯 1987년 7승, 1988년 4승을 기록하며 긴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야마다의 통산 283완투는 역대 6위의 기록이며, 이중 총 42경기를 무사사구로 막아내어 빼어난 컨트롤을 증명했다. 언더스로 투수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시피한 그는 현재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맡고 있다.

무라타 쵸지(村田兆治)

1949년생, 우투우타, 통산 215승 177패 33세이브, 방어율 3.24, 2363탈삼진, 방어율1위 3회, 다승1위 1회, 세이브1위 1회, 탈삼진1위 4회.

1968년 드래프트 1위로 롯데의 전신인 토쿄 오리온즈에 입단. 3년째에 5승으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무라타는 4년째에 그 유명한 '도끼투구자세(まさかり投法)'로 12승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노모의 투구폼 이전에 이미 무라타의 그것이 있었다) 1974년에는 12승을 기록하며 팀을 시리즈 정상까지 올려놓았으며 다음해에는 방어율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76년에는 자신의 긴 손가락을 이용하여 포크볼을 개발, 21승을 기록했다. 포크볼은 탈삼진수 증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79년 6월13일 세이부전에서는 8회 1사까지 퍼펙트게임을 진행하다 홈런 한방으로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1981년에도 19승을 기록하며 최다승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1982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선수생활의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죠브 박사의 집도 후 재기에 성공, 1985년에는 개막 후 11연승을 기록하며 총 17승(5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자리 승수를 기록했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세이부를 상대로 했던 은퇴경기에서는 총 5이닝을 던져 강우콜드 완봉을 기록했는데, 이 경기에서의 최고 구속은 시속 145km로 측정되었다. 강속구 투수였지만 컨트롤에 문제가 있던 그는 통산 148개의 폭투로 역대 1위에 랭크되어 있다. 총 13회 올스타전에 출장하였으며 두자리수 탈삼진을 기록한 경기는 총 27회, 그의 2363탈삼진은 역대 8위의 기록이다.

스즈키 케이시(鈐木啓示)

1947년생, 좌투좌타, 통산 317승 238패 2세이브, 방어율 3.11, 3061탈삼진, 다승1위 3회, 방어율1위 1회, 승률1위 1회, 탈삼진1위 8회, MVP 1회, 베스트나인 3회.

본래 고교 중퇴 후 한신 입단을 계획하고 있던 스즈키였지만 주위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1966년 드래프트 2위로 킨테츠에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첫해 10승을 기록한 그는, 2년째부터 5년 연속으로 20승 이상과 6년 연속 탈삼진 수위를 차지했다. 이 기간 중 두 차례 노히느 노런의 대기록도 달성. 그러나 통산 무사사구 경기수 1위(78경기)인 스즈키로서는 퍼펙트 게임이 아닌 것이 다소 아쉬웠다. 1970년 10월12일 한큐전에서는 매회 탈삼진을 기록하는 빼어난 피칭을 자랑. 나이가 들고 구속이 떨어지자 1973년부터 2년간 11승과 12승에 머물렀지만 기교파투수로 대변신하여 1975년 22승을 기록, 부활했다. 다승, 방어율, 탈삼진 3관왕을 차지한 1978년에는 10경기 연속 완투 승이라는 또하나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개막전 14회 선발은 역대 최고. 한편 언제나 정면승부를 고집했던 이 에이스는 세계 신기록이기도 한 560개의 홈런을 허용하였다. 총 15회 올스타 전에 출장하였으며, 1985년에 은퇴했다. 좌우명인 '초혼'으로 더욱더 유명하다.

키다 이사무(木田勇)

1954년생, 좌투좌타, 통산 60승 71패 6세이브, 방어율 4.23, 860탈삼진, 다승1위 1회, 방어율1위 1회, 승률1위 1회, 탈삼진1위 1회, MVP 1회, 베스트나인 1회, 골든글러브 1회, 신인왕.

(이제까지 소개된 투수들은 어느 누구라도 최고의 투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만하다. 그런데 이 키다 투수는 통산 60승에 불과하며 11년동안 세팀을 전전하다가 은퇴했다. 그럼에도 이 투수가 니혼햄의 에이스로 선정된 이유는?)

사회인 야구 선수였던 키다는 1980년 드래프트 1위로 니혼햄에 입단하였다. 1980년 세이부와의 데뷔전에서 승리를 따낸 키다는 그해 40경기에 등판, 253이닝을 투구하여 22승8패4세이브, 방어율 2.28, 225탈삼진, 승률 0.733을 기록했다. 선발투수가 오를 수 있는 전 부분에서 수위를 차지했으며, 신인왕은 물론 MVP도 그의 몫이었다.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역시 부산물이었다. (총 11관왕) 1983년 9월21일에는 9회를 완투하면서 총 209개의 공을 던졌다. 타이요로 트레이드 된 1986년, 6월10일에 한 이닝동안 4개의 피홈런을 허용하는 기록을, 1988년 9월6일에도 역시 한 이닝 동안 5개의 사사구를 연속으로 허용하는 또 하나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1990년에는 주니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으며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입단 이듬해 기록한 10승이 그의 마지막 두자리 승수였고 이후 6승, 4승, 6승, 2승, 8승, 0승, 1승, 1승, 0승을 기록을 남긴 것이 전부였음에도 그는 첫해의 너무나도 강렬한 활약 때문에 니혼 햄의 훌륭한 에이스로 기억되고 있다. 인쇄소에서 근무하다가 1997년 해설가로 데뷔하였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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