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시장은 좁고 재고는 많다

  • 입력 2002년 1월 22일 18시 22분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구약성경 창세기 22장 17절)

성경의 구절처럼 바야흐로 물자가 넘쳐나고 있지만 남아도는 물건은 이제 ‘복’이 아니라 ‘애물’이 되고 있다.

광양 포항제철의 한 창고 속에는 거대한 설비 덩어리가 몇 년째 먼지 속에 보관돼 있다. 증산을 위해 도입했다가 98년 계획을 취소하면서 쓸모 없게 된 미니밀 설비다. 세계 철강수요가 당초 예상에 못 미치자 포철은 200만t짜리 생산능력을 갖춘 이 설비를 창고 속으로 밀어 넣었다. 포철은 현재 이 설비를 중국에 팔려고 내놓았으나 팔리더라도 상당한 손실을 보게 됐다.

멀리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 자리잡은 유럽 최대 규모의 유지노 제철소. 수 십 년간 이 고장의 자랑이었던 제철소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길엔 요즘 불안과 걱정이 묻어 있다. 유지노가 룩셈부르크의 아베르, 스페인의 아세랄리아와 합병하면서 낡은 설비 폐쇄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세 업체는 지난해말 세계적 공급과잉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음달 합병한다고 발표했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의 후고벤스 제철소 주변 주민들도 이 점에선 비슷한 심정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철강위원회는 세계적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작년 6월부터 모임을 갖고 나라별로 10%씩 감산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구체적 시행 방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아 아직 마찰을 빚고 있다.

▽물건 얼마나, 왜 남아도나〓과잉생산은 철강뿐만 아니라 자동차 반도체칩 석유화학 등 제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슷하다. 2000년 기준으로 자동차 메이커들은 5100만대의 세계 수요보다 30% 이상 많은 6400만대를 공급할 수 있다. 석유화학은 15% 이상, 철강은 14% 이상 생산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다.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잭 웰치는 평소 “모든 부문에 가격인하 압력이 엄청나다. 거의 모든 산업에서 세계적인 과잉설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세계의 기업들은 이제 물건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창고 가득한 재고품을 떨어내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를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은 “경기 순환과는 다른 차원에서 공급과잉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공급과잉의 원인을 단순화하면 꾸준히 늘어난 제조업 생산능력 속도를 수요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향상된 데다 많은 나라들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 수출지향적 정책을 펴면서 생산을 늘렸다. 반면 이를 소화할 시장은 그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과거엔 식민지 등 ‘신시장’을 개척해 늘어난 생산능력을 흡수했으나 아프리카 등 신흥시장의 성장은 정체돼 있다.

▽설상가상 중국 등장〓새로운 ‘세계의 제조창’ 중국의 공장들이 본격 가동되면 공급과잉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여기에 세계 각국이 중국시장을 겨냥해 생산능력을 늘리고 있어 공급과잉의 악순환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국내 화학업계는 현재 건설중인 중국의 화학공장들이 2005년경 본격 가동되면 엄청난 물량 압박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중국 내에서조차 80∼90년대 확장노선의 추진 결과 이미 과잉투자를 초래하고 있다”면서 “특히 각종 가전 메이커의 설비가동률은 50% 전후까지 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경제 구조조정의 방아쇠〓이희범(李熙範) 산업자원부차관은 “세계경제 전체가 앞으로 몇 년간 공급과잉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구조조정 작업을 거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각국의 구조조정 과정은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통상마찰 증가, 기업들의 활발한 사업 전환과 감산 및 대형화 바람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의 쇠퇴로 개도국이 예전같은 ‘경제신화’를 창조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이나 한국, 싱가포르처럼 낮은 인건비로 만든 제품을 부유한 나라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식은 이제 ‘좁은 길’이 됐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