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원의 봉주르 에콜]〈1〉쉬는 시간엔 운동장이 교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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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프랑스에서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이 쉬는 시간에 겪은 일이다. 덩치 큰 여학생들이 우르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이거 어디에서 샀어”라며 입은 점퍼를 가리켰다. 프랑스 말이 서투른 아들은 잔뜩 위축돼 “한국…”이라고 모깃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거봐! 중국 거 아니잖아.” “한국 게 예쁘다니까.”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투덜대더니 갑자기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럼, 너 한국 사람이구나!” “케이팝 가사 좀 가르쳐 줘.” 쉬는 시간에 ‘일진’ 누나들에게 갈취 당할 줄 알았던 아들은 ‘한류 팬’을 만나 친해졌다.

프랑스 중·고교에서는 한 시간 수업 후에 5분 동안 ‘짬’이 있다. 두 시간 수업 후에는 진짜 쉬는 시간. 오전하고 오후, 하루에 두 번, 20분씩 쉰다. 아니, ‘쉬어야 한다’. 쉬는 시간에는 학생이 교실에 남을 수 없다.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야 한다. 교실 문은 잠근다. 복도를 어슬렁거려도 안 된다.

“쉬는 시간엔 뭘 하니?” 프랑스 생활에 익숙해진 아들에게 물었다. “그냥 햇볕 쬐면서 멍 때리거나, 운동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다른 반, 다른 학년 애들이랑 떠들기도 해요. 그래서 그 누나들도 만났던 거죠.”

“싸움은?” “말다툼은 하는데 몸싸움은 거의 없어요. 감독관이 여러 명인 데다 항상 가까이에서 지켜보다가 싸울 낌새가 보이면 당장 달려오거든요. 혹시 감독관이 못 보면 애들이 쪼르르 달려가 이르기도 해요. 좀 ‘고자질쟁이’ 같아요.”

쉬는 시간에는 ‘감독관’들이 전적으로 학생들을 맡는다. 교감이나 교장은 가끔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지 둘러보기도 하지만, 교사는 쉰다. 서너 명의 남녀 감독관이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을 지켜보고 복도나 계단, 화장실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숨어서 ‘딴짓’을 하다 걸리는 학생들은 벌을 받는다.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다. 쉬는 시간에 복도 한구석에 숨어 있는 여학생 둘을 발견했다. 처음이라 잘 몰랐던 터라 그냥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내 덕분에 벌을 면한 그 아이들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때부터 수업 시간에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하루 두 번, 이 20분의 쉬는 시간을 프랑스말로 ‘레크레아시옹(r´ecr´eation)’이라고 한다. ‘휴식, 오락, 기분 전환’이란 뜻인데, ‘재창조(recr´eation)’와 어원이 같고 철자도 거의 같다. 철저한 보호 아래 밖에 나가 놀 수 있는 시간, 아니 반드시 밖에 나가 놀아야 하는 시간. 뭔가를 다시 창조할 힘을 회복하는 시간. 그게 내가 본 프랑스 학교의 ‘쉬는 시간’이다.

귀국 후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강의할 때였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노는 학생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교실에는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랑스 학교의 쉬는 시간 풍경이 떠올라 더욱 안쓰럽고 속상했다.
 
임정원 하비에르국제학교 한국어·프랑스어 교사
 
※프랑스에서 중·고교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 국제학교 교사인 임정원 씨가 현지와 우리 교육 현실을 비교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프랑스#프랑스 학교#레크레아시옹#프랑스 학교 쉬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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