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헬조선’ 저주의 어두운 그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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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는 국가별 삶의 질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권위 있는 국제통계다. 1인당 국민소득, 기대수명, 교육기간 같은 경제 및 사회 지표를 종합해 각국의 선진화 정도를 평가한다. 한국의 작년 HDI 순위는 세계 187개국 중 15위로 47개국이 포함되는 ‘최상위권’에 속한다. 일본은 17위, 중국은 91위였다.

얼마 전부터 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헬조선’이란 얄궂은 단어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헬(hell)과 조선을 합성해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동의어 격인 지옥불 반도, 개한민국, 망한민국 같은 말 역시 음습하고 저질이다.

바깥 세상에 대한 無知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유난히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반적인 현상이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젊은이들이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진 현실도 안타깝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지옥’ 운운하면서 한국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식(式) 인식이다. 헬조선이라는 저주가 현실에 대한 건강한 비판을 넘어 특정 세력의 악의적 낙인찍기나 선동과 무관한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헬조선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섬뜩한 문구(文句)가 눈에 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이달 초 동아일보 칼럼에서 내전과 빈곤의 고통을 피해 유럽을 향해 필사적 탈출을 하는 중동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을 다뤘다. 박 교수는 “헬이란 이런 데에 쓰는 말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한국을 비하하며 즐겨 쓴다는 헬조선은 결국 바깥 세상에 대한 무지(無知)의 소산이나 다름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굳이 한반도에서 헬조선에 어울리는 곳을 찾으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민주주의도, 인민도, 공화국도 없는 ‘빈곤, 공포, 죽음의 땅’ 북한일 것이다.

취업난에 힘들어하긴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 이후 일자리 찾기가 더 어려워진 현실의 본질적 원인을 물으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청춘도 많다. 구미 선진국은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중국보다 시장과 기업, 경쟁과 개방에 더 적대적인 한국의 전반적인 풍토가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주범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당신은 행복한 삶을 당연히 누려야 하는데 사회나 국가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일부 지식인의 사이비 힐링론(論)에 넘어가는 것은 금물이다. 일본의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겼다는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는 말이 인생의 본질에 더 가깝다.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직원, 공무원과 교사 같은 일자리를 무한정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점도 냉엄한 현실이다.

사이비 힐링 주장을 경계하라

지구상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이 전 세계 인구의 70%인 40억 명에 이른다. 자신을 우리 사회의 비주류였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는 ‘차라리 죽지 그래’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에서 “현재의 당신이 아무리 최악이라도 그들보다는 최소한 70배는 낫다”면서 “절대 핑계대지 말고 절대 좌절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물론 정부와 정치권, 기업이 절망하는 백수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해야 할 책무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제3세계 국민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코웃음을 칠 황당무계한 헬조선 선동에 휘둘릴 일은 아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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