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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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서천령(西川令)은 왕실의 친척인데 장기를 잘 두어 우리나라 최고수로 당대에 대적할 만한 적수가 없었다. 한 늙은 병사가 번(番)을 들기 위해 남도로부터 올라오면서 준마를 끌고 와 뵙고는 말하였다. “공자께서 장기를 잘 두신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기지 못하면 이 말을 드리지요.”

세 판을 두어 두 판을 지자 늙은 병사가 마침내 그 말을 바치고 떠나면서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이 말을 잘 먹이십시오.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두어서 말을 되찾아갈 것입니다.” 서천령이 웃으며 말하였다. “좋소이다.”

장기의 당대 최고수인 서천령에게 촌구석의 하급 병사에 불과한 늙은이가 감히 장기 두기를 제안합니다. 좋은 말까지 내기에 걸었으니 이건 아예 거저 바치겠다는 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기에 져서 마침내 말을 빼앗기게 되었죠. 그래도 군인이라고 오기는 남았던지 다음에 다시 두어서 되찾아가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서천령은 준마를 얻은지라 이때부터 다른 말보다 갑절이나 먹여 키우며 매우 튼튼하게 잘 길렀다. 뒷날 그 늙은 병사가 임기가 다하자 과연 다시 와서 장기를 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서천령이 세 판을 두어 세 판을 다 지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새 서천령의 실력이 확 줄었나요? 아니면 병사가 근무는 안 서고 장기만 연습했나요? 늙은 병사가 말을 끌고 돌아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이 말을 사랑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번을 서게 되었는지라, 객지에서는 말을 잘 먹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잠시 공자님 댁에 맡겨 두었던 것입니다(小人愛此馬, 自知上番京師, 客中難得善3, 姑托公子家矣). 이제 공자께서 잘 길러주신 덕에 비루먹은 말이 이토록 튼튼해졌으니 감격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 선생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웃자고 만든 책인데 웃고 말 일이 아닌 듯합니다. 새해 다짐. 아, 세상에는 숨은 고수가 많구나,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잘난 척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겠구나.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유몽인#어우야담#서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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