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8> 아마 바둑대부 임동균 7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7일 1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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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바둑계의 대부로 불리는 임동균 아마 7단. 한때는 프로가 되기 위해 20여차례나 입단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제는 “영원한 아마추어”로 불리는 게 좋다고 한다.
아마추어 바둑계의 대부로 불리는 임동균 아마 7단. 한때는 프로가 되기 위해 20여차례나 입단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제는 “영원한 아마추어”로 불리는 게 좋다고 한다.
"아마추어 바둑계의 대부지요. 일본 아마추어 바둑계에 4천왕이 있다면 한국에는 임동균 사범이 버티고 있다고나 할까요. 아마추어 바둑대회 1회 대회를 전문적으로 우승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지요(웃음). 또 낭만 기객(棋客)입니다."(정동환 한국기원 기전사업국장)

"아마 고수로 각종 아마 행사에 참여해 전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입니다. 술을 좋아해 주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방송용'이고요."(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실장)

아마추어 바둑계의 맏형으로 불리는 임동균 아마7단(64)은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건설회사 직원으로 근무했고, 바둑교실 원장에 한국기원 보급팀장을 지냈으며, 바둑TV 진행자로도 유명하다. 그가 프로 입단대회에서 20차례 이상 낙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25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먼저 근황을 물었다.

"아마추어 바둑리그인 내셔널리그 서울 건화팀 감독으로서 올해 뛸 선수 선발을 마무리했습니다. 지난해 서울 건화팀이 우승할 때 주축 멤버였던 심우섭 장현규 홍무진 외에 연구생 출신의 이유진, 김동근 사범을 선수로 뽑았습니다. 올해도 4강 이상이 목표입니다. 포스트리그에 진출해야 우승을 꿈꿀 수 있으니까요."

감독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얼마 전까지 대한바둑협회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바둑협회 수석부회장이다. 최근엔 송파구바둑협회 창립을 도와주기도 했다. 또 바둑TV '고교동문전'을 한철균 프로와 함께 7년째 진행해온 방송 베테랑. 초점국이나 아마추어 바둑대회인 지송배 등을 방송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임동균 아마7단이 ‘여류 대 시니어 대항전’에서 대국하는 모습. 바둑TV 제공
임동균 아마7단이 ‘여류 대 시니어 대항전’에서 대국하는 모습. 바둑TV 제공
그는 아마추어 전성기 때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아마 대회로서는 처음으로 우승 상금을 내건 1회 조남철배(1981년)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지송배, 의당배, 인천아마협회 초청대회, 세계페어대회 국내 선발전 등 초대 대회에서 10차례 우승했다. 그의 우승기록은 12번.

그가 바둑을 배운 것은 10세 때. 네 살 위인 형 창균 씨(현재 아마 5단)로부터였다. 그의 집안은 바둑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6·25전쟁 때 황해도 개성에서 경기 화성군 발안면으로 피란 내려올 때 그의 조부가 웬만한 세간은 다 버리면서도 등에 지고 온 것은 비자나무 바둑판이었다. 그가 5세 때 돌아가신 조부의 바둑실력은 3급쯤. 그 바둑판은 밑에 한자가 쓰여 있는 등 어린 나이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형은 내 바둑의 첫 번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형과 그 바둑판 위에서 '내기 바둑'을 두며 바둑을 배웠다. 내기는 방 청소하기, 마당 쓸기 등 집안일이었다. 수백 판은 뒀을 것이다. 현대자동차에 30년간 다니다 은퇴한 형과는 1년에 한두 번 바둑을 두는데, 요즘은 내가 두 점을 접어준다. 당시 어머니가 바둑을 싫어한데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유도를 배우는 바람에 바둑실력이 크게 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때 바둑이 늘었다. 경신고 2학년 때 유도 도장을 새로 짓는 바람에 자율 훈련을 할 수 있었고, 그때 삼선교에 있던 기원을 다녔다. 당시 4급이었는데 강1급 선생과 석 점을 접히고 열심히 둬 얼마 안 가 약 1급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결정적으로 바둑이 는 것은 19세 때다. 외할머니가 아파 의정부의 집을 비워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혼자 바둑 책을 싸들고 가서 집을 지키며 공부를 해 강1급이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마 정상급과 겨룰 수 있게 됐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어 대학을 포기했다. 운 좋게도 그가 살던 성북구 정릉 입구에 있던 기원은 바둑 고수들이 모이는 양산박이었다. 양상국(현재 프로 9단)의 4형제와 임동균의 형제가 강 1급이었다. 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훗날 프로로 입단한 김학수 백성호 이주룡 이계훈 등도 이 기원에 자주 들렀다.

임동균은 1969년부터 입단의 문을 두드린다. 그의 친구이자 바둑 스승인 양상국은 1970년 입단했다. 당시 그에게는 또 다른 맞수가 있었다. 연세대 기우회장을 지낸 박종건 씨다. 처음엔 기원에서 두다가 서로의 집을 오가며 1000판 정도를 뒀다.

임동균은 바둑을 좋아했지만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 다녔다. 1973년 입대하기 전까지 3년간 신풍건설에서 몸을 담았다. 1976년 제대한 뒤에는 평택화력 기계부에서 근무했다. 이 회사가 여수 화력과 합병되면서 여수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1979년 바둑계로 컴백한다. 1980년 양상국 프로가 잠실에 낸 한국기원 강동지원의 지도사범으로 제2의 바둑 인생을 시작했다. 이때 양상국 프로의 부인과 같은 직장에 다니던 공선자 씨(당시 24세)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 입단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해는 1983년.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한국기원 총재로 부임하던 해였다. 양상국 프로 등의 도움으로 그해 9월 울산의 동축사에서 '입산수도'를 하게 된다. 금연 금주를 선언하고 바둑 공부에 매진했다. 입단대회는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보름 전에 제17회 아마 국수전이 열린다는 소식이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하산해 대회에 참가했다. 입산수도의 효력이 있었던지 그는 아마 강자이던 오규철(현 프로 9단) 김종준(현 프로 6단) 김철중(현 프로 3단), 박윤서 아마 6단을 제치고 결승에 올랐다. 그러고는 유창혁과 결승에서 맞닥뜨렸다.

임동균 아마7단이 여성 진행자와 방송을 준비하는 모습. 바둑TV 제공
임동균 아마7단이 여성 진행자와 방송을 준비하는 모습. 바둑TV 제공
결승 대국은 임 7단이 지려야 질 수 없는 바둑이었다. 주변에서 바둑판을 보고는 "드디어 입단하네"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토록 고대하던 입단이 눈앞에 왔다고 느껴서일까, 마음이 흔들렸다. 끊었던 담배가 고팠다. 담배 연기를 목으로 넘긴 순간 핑 돌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이후 유창혁의 연이은 승부수에 한발 두발 물러나다 결국 역전패를 당했다. 자책이 몰려왔다. 보름 뒤에 열린 입단대회 성적은 엉망이었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재와 근성, 그리고 체력이다. 그런데 나는 근성이 약했다. 독을 품고 두는 바둑은 잘 안됐다. 그래서 결정판에서 무너질 때가 많았다. 유창혁과 둔 판도 그랬다. 당시 유창혁은 아마국수전 우승 자격으로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했고, 이듬해 입단에 성공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유창혁이라는 불세출의 기사가 성장하는 데 디딤돌이 된 것이다(웃음)."

그러고는 그는 이듬해인 1984년 대우건설 직원으로 이란으로 떠난다. 당시 대우건설은 이란 남부에서 테헤란을 잇는 철도 구간 중 터널과 교량이 많은 40km 구간의 시공을 맡았다. 그때의 에피소드. "건설회사 등에서 6년간 근무했던 경험이 인정돼 구매업무를 담당했다. 당시는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 중이었고 호메이니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1979년 무너진 팔레비 왕조의 영향도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술도 '구매'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대우이란철도현장소장이던 최훈 이사와 바둑을 많이 뒀다. 비슷한 실력이었다. 이란에 있던 26개월 동안 10번기 형식으로 25번을 뒀으니 250차례 이상 바둑을 둔 셈이다. 처음에는 밀렸으나 나중에는 우세해졌다. 당시 그는 계약사원으로 지냈으나 정사원이 되기는 어려웠다. 1987년 귀국해 다시 바둑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잠원동에 어린이 바둑교실을 차렸다. 어린이의 집중력을 키우는 데 바둑이 좋다는 인식이 있어 제법 잘됐다. 그러나 성이 차질 않았다. 어린이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보자는 결심이 섰다. 그래서 프로 기사가 없는 지방도시를 물색하다가 1990년 청주에서 기원을 냈다. 100석 규모의 큰 기원이었는데 제법 돈을 만지게 됐다. 당시 청주의 의사 변호사 등 바둑을 좋아하는 술꾼들과 '기인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딸 교육 문제와 잦은 술자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자'는 부인의 성화에 내몰렸다. 결국 5년 만에 다시 상경했다.

때마침 현재현 한국기원 이사장이 아마추어 바둑 보급을 중시하면서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던 때라 한국기원 보급팀장으로 스카우트될 수 있었다. 그때도 직원들과 바둑 보급을 하며 술을 많이 마셨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정동환 국장과 전재현 운영1부 팀장의 주례도 섰다. 1년 정도 됐을까, 1995년 9월 바둑TV가 시험방송을 할 무렵 진행자로 눈에 띄어 그해 12월 개국 때 해설위원으로 옮겨갔다. 이후 지금까지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술꾼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바둑계에 말술로 유명한 김희중 프로와 많은 밤을 술로 지새웠다. 어느 땐가는 그 둘을 포함한 3명이 밤새 술을 마셔 작은 여관방 4면을 빙 돌아가며 빈 소주병으로 채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술에 대한 품평. "김희중 프로가 가장 셌다. 나와 그는 주종 불문, 분위기 불문하고 술을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김인 국수님도 술로 유명하신 분이다. 내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외가 쪽 피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외가는 고려 때부터 개성에서 인삼밭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정릉에서 혜화동까지 산을 두 개 넘고 통학해 다리 힘을 키운 것과 유도를 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요즘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려 노력한다."

그는 바둑계에서는 양상국 김희중 유병호 이홍렬 한철균 강훈 프로 등과 종종 어울리는 편이다. 또 아마추어 고수들의 모임으로 1980년에 생긴 '석맥회'(1954년생들이 주축)의 멤버로 1년에 두세 차례 자리를 같이한다.

후배들은 그를 '프로보다 더 성공한 아마추어'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프로가 되지 못한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리라. 임 7단은 "나는 바둑계에서 과분한 혜택을 받았다. 내가 받은 혜택의 일부라도 돌려주는 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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