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거하게 한잔 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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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 카피가 있다. 떡이 된 사람은 만취한 사람이다. 실제로 4성 장군이 술에 떡이 돼 옷을 벗었다.

‘외모는 거울로 보고 마음은 술로 본다.’ ‘청동은 모양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술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얼마나 똑같은가. 앞의 것은 우리나라 속담이고, 뒤의 것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한 말이다. 그만큼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술은 인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에우리피데스는 ‘술이 없는 곳에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당연히 술에 관련된 속담 격언 경구는 넘쳐나고, 시대에 따라 새로 생기기도 한다.

“오늘 거하게 한잔 쏘세요.”

요즘 흔히 쓰고 듣는 말이다. ‘반 잔 술에 눈물 나고, 한 잔 술에 웃음 난다’는 말도 있으니 이왕 대접할 바에야 제대로 대접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술이든 밥이든 ‘거하게’ 살 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거하다를 한자 ‘클 거(巨)’가 들어간 ‘거(巨)하다’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말은 우리 사전에 없다. ‘거하다’는 ‘산 따위가 크고 웅장하다’ ‘나무나 풀 따위가 우거지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술이나 음식과는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다.

바른 표현은 ‘건하다’이다. 건하다는 ‘아주 넉넉하다’는 뜻이다. ‘술 따위에 어지간히 취한 상태’를 말하는 ‘거나하다’의 준말이기도 하다. 간혹 이를 ‘걸하다’ ‘찐하다’로 쓰기도 하는데 이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걸하다는 ‘재빠르다’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 찐하다는 표제어에 올라 있지만 뜻은 ‘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언짢고 아프다’이다. ‘짠하다’와 같은 의미다. 술을 언짢고 짠하게 사서야 되겠는가.

‘쏘다’는 표현도 역시 문제다. ‘쏘다’엔 ‘돈을 내다’라는 뜻이 없다. 쏘다를 대신할 말은 무엇일까. ‘(한턱) 쓰다’가 있다.

하지만 사전을 들춰가며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언중이 말맛에 이끌려 ‘돈을 내다’의 의미로 ‘쏘다’를 꾸준히 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양한 연령층에서 쓰고 있으니 언젠가는 쏘다에 ‘한턱 쓰다’라는 뜻풀이를 더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쏘든, 쓰든, 내든 중요한 건 어떻게 마시느냐이다. 까딱 잘못하면 우리나라에선 ‘술 먹은 개’가 될 수 있다. ‘입술과 술잔 사이에는 악마의 손이 넘나든다.’(요한 프리드리히 킨트)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쏘다#한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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