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산에 산에 눈꽃 피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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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사르락! 사락! 설핏 책갈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금세 싸르락! 싸락! 조리로 쌀 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엌에서 새벽밥 지으시는가. 문득 창문을 열고서야 도둑눈이 오신 걸 알았다. 민박집 함석지붕에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그렇게 밤새도록 고시랑고시랑 조곤조곤 눈이 내렸다.

어스름 첫 새벽, 설산(雪山)을 오른다.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온 세상이 하얗다. 복슬복슬 복눈이 소복하다. 아무도 밟지 않는 숫눈에 찍히는 숫발자국.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날것 그대로 귓속에 날아와 박힌다.

‘눈 즈려밟는’ 아삭아삭 잔물결 파동이 발치에서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진다. 발바닥 가운데에 은근히 부풀어오는 물렁한 촉감. 사각사각! 야릇하고 간지럽다. 곰삭은 홍어 뼈, 잇몸으로 살살 씹는 맛이 이럴까. 맨발로 비닐공기방울 ‘투∼욱 툭’ 터뜨리는 느낌이 이럴까.

눈꽃이 이 골짝 저 기슭 다발로 피었다. 산중턱까진 낙우송 졸참나무 물박달나무 고로쇠나무 생강나무가 온몸에 눈꽃을 매달았다. 층층나무 가래나무 물푸레나무도 송이송이 눈꽃이다. 앙증맞다. 문득 눈꽃 덩어리가 제 무게를 못 이겨 스르르 통째로 떨어진다. 모가지가 툭 꺾이는 하얀 동백꽃이다.

눈꽃 산행은 뭐니 뭐니 해도 태백산, 덕유산, 무등산, 한라산이 으뜸이다. ‘눈꽃 4대천왕’이라 할 만하다. 하나같이 살집 두툼한 육산(肉山), 흙산이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높되 험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그 품이 아늑하다.

황소 잔등이나 마찬가지인 태백산, 중년 여인의 둔부같이 완만한 덕유산, 아버지 등짝처럼 평평하고 너른 무등산, 낮게 누운 이등변삼각형의 밋밋하고 느릿한 한라산. 아이젠, 스패츠 등 간단한 장비만 갖추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덕유산 향적봉은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순식간에 닿는다.

산꼭대기 평원은 얼음꽃 세상이다. 나뭇가지마다 얼음꽃이 덕지덕지 매달렸다. 상고대(air hoar)가 반짝반짝 수정처럼 빛난다. 마른 철쭉가지엔 얼음꼬마전구가 주렁주렁하다. 금방이라도 깜박깜박 전깃불이 들어올 것 같다. 억새 쑥대머리 위에는 아예 ‘얼음꽃 모자’가 깊숙이 눌러 써졌다.

상고대는 나무서리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어붙은 것이다. 겨울나무의 눈물꽃이다. 멍울멍울 은구슬꽃이다.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상고대를 피우며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한다. 살은 갈라지고, 껍질은 트다 못해 얼어 터진다.

산등성이 주목나무는 영락없는 ‘얼음꽃 크리스마스트리’이다. 붉은 열매, 붉은 껍질에 늘 푸른 바늘잎.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그리고 땅바닥에 허허롭게 쓰러져서 천년. 무려 3천년 동안 얼음꽃을 피운다. 한라산엔 토종 구상나무가 우렁우렁 상고대를 매단 채 검푸른 제주 바다를 내려다본다.

상고대는 해가 뜨면 녹기 시작한다. 동틀 때 보는 상고대가 가장 황홀하다. 저마다 앞다퉈 이른 새벽에 설산을 오르는 이유다. 햇살에 반짝이는 수정 얼음꽃. 바람이 불면 우수수 온갖 색이 버무려져, 아롱아롱 무지갯빛을 뿜어낸다.

‘돌에 핀 눈꽃’도 빼놓을 수 없다. 무등산 입석대, 서석대의 수정 병풍바위가 그렇다. 마치 무를 길쭉길쭉 직사각형으로 잘라낸 것 같은 선돌(10∼16m) 더미가 우뚝우뚝 늠름하다. 눈가루를 흠뻑 뒤집어쓴 울퉁불퉁 이마에 바위머리를 살짝 덮은 깻잎은발. 사각 면류관에 얼음구슬 꿰미를 늘어뜨린 오색영롱한 빛깔들. 몽환적이다.

눈꽃은 촉촉해야 예쁘다. 밤새 찬바람 맞은, 마른 눈꽃은 어딘지 까칠하다. 햇살에 살짝 녹아야 아이스크림처럼 푸근해진다. 동녘의 말갛고 붉은 해가 한 뼘쯤 솟았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나뭇가지의 눈꽃 숭어리가 우우우 기지개를 켠다. 눈꽃 속의 은싸라기들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겨울나무는 얼음꽃을 수없이 피운 뒤에야, 비로소 새봄 황홀한 꽃을 피워 올린다. 붉은 철쭉꽃도 그렇게 올라온다. 맑고 향긋한 매화꽃 등불도 그렇게 화르르 불을 켠다. 진달래도 그렇게 울컥울컥 붉은 꽃을 토해낸다. 사람도 그렇다. 묵은지처럼 오래오래 곰삭아야 향내 나는 사람이 된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나무#눈꽃#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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