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내 인생을 생중계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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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밤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일에 쫓겨 단조로워진 삶에 지칠 때마다 다른 이들의 다양한 인생을 보며 대리만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들거나 누군가를 미행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밤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보고 싶다면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합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젊음이 넘치는 홍대 거리에서 즉석 만남을 추진하는 20대 남성이 눈에 띕니다. 길을 지나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가 거절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왠지 내 일인 양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또 다른 남성이 혼자 2박 3일로 일본 여행을 떠나 나고야 일대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면 침대에 누워서도 마치 일본에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밤늦게 야참이라며 라면 10인분과 치킨 2마리를 쌓아두고 먹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면서도 괜히 배가 출출해집니다.

인터넷 개인방송국 아프리카TV에서는 매일 수백 명의 개인방송진행자(BJ·Broadcasting Jockey)가 자신의 인생을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1998년 미국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은 자기 인생 전체가 TV 쇼 소재로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거대한 스튜디오를 스스로 박차고 나가지만, 2015년 대한민국 BJ는 자발적으로 세상을 스튜디오 삼아 인생을 생중계합니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거나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모습, 병원에서 진료를 받거나 동네 슈퍼에 장 보러 가는 일상 등 인생의 매순간이 방송 콘텐츠인데, 인기 높은 방송은 시청자가 수만 명에 이릅니다.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아프리카TV 인기 BJ 1위 철구(이예준·26)가 25일 주선하고 생중계한 2 대 2 미팅이 화제입니다. 20대 남성 BJ 2명과 20대 여성 2명이 철구 소개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1∼3차 술자리를 갖는 과정을 전부 생중계했는데, 19세 이상 성인 3만∼4만 명이 어떡해야 이성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 ‘연애 훈수’를 두거나 여성들의 미모에 부러워하는 의견을 채팅으로 나누면서 방송을 지켜봤습니다. 3차 술자리를 간 게 오전 5시경이었는데도 2만 명 가까이 방송을 지켜볼 만큼 관심이 쏠렸습니다.

방송은 미팅 전에 남성끼리 만나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연애 경험이 많은 철구가 미팅을 할 남성 BJ 2명에게 “적당히 들이대되 성적인 드립을 치면 안 된다” “스킨십은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한다”는 등 여심을 사는 방법이라며 조언을 합니다. 하지만 ‘연애불능’에 가까워 보이는 ‘BJ 이기광’은 상대 여성에게 반해 만나자마자 “사귀자”라는 무리수를 던지고, 몸무게 세 자리대의 거구 ‘BJ 엄삼용’은 매너를 갖춘 캐릭터로 가겠다며 상대 여성에게 말도 잘 걸지 않고 미적지근하게 대합니다. 여성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질 때마다 시청자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답답해하며 각자의 미팅 비책들을 내놨습니다.

방송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여성들은 처음엔 헛발질을 남발하는 남성들에게 썩 만족하지 않다가 점점 마음을 풀더니 2차에 이어 3차까지 술자리를 이어갔습니다. 수만 명이 미팅 현장을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반응을 쏟아내는 게 신기했던 모양입니다(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첫 만남 이후 27일 BJ 이기광이 상대 여성과 다시 만나 밤바다에서 사랑을 고백하며 연인이 되는 장면도 수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중계됐습니다.

대부분의 인기 BJ는 직업으로서 인생을 생중계합니다. 시청자에게 선물 받으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별풍선이라는 아이템이 주요 생계수단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BJ가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 별풍선을 많이 받기 위해 부적절하거나 선정적인 방송을 자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요즘엔 BJ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정 노력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프리카TV 측이 모니터링을 하면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방송을 하는 BJ에 대해선 계정을 영구 정지해 방송을 아예 할 수 없도록 조치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10대 사이에선 개인방송 BJ를 장래희망으로 꿈꾸는 아이도 많습니다. 15년 전에는 게임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아이들이 그저 철없어 보였겠지만 지금은 대기업 유니폼을 입은 프로게이머가 흔합니다. 트루먼쇼의 주인공도 미래에 자발적으로 인생을 생중계하는 이들이 생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지금 인기 BJ는 방송 한 번에 수백만 원을 벌기도 합니다. 혹시 BJ가 꿈이라는 아이를 만난다면 무작정 나무라지만은 마십시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인생#생중계#아프리카TV#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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