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전두환과 정병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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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간의 화제가 될 때마다 내 머리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이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사진 속에서 봤을 뿐이다. 그 가운데서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는 것은 공수부대 베레모를 쓴 군복 입은 당당한 모습이 아니다. 나뭇가지에 목을 맨 남루한 노인의 모습이다.

1989년 3월 어느 날, 치안본부(현재 경찰청) 출입기자였던 나는 형사과 사무실에서 몇 장의 사진을 보았다. 실종된 지 130여 일 만에 서울 인근 야산에서 발견된 정병주 예비역 소장의 시신이 담긴 현장 사진들이었다. 수사 경찰관들이 찍은 사진 속에서 흰색 점퍼 차림의 그는 올가미를 맨 목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시신 아래에는 소주병 3개가 보였다. 올가미가 벗겨져 땅바닥에 뉘어진 그는 영락없이 서울역 부근에서나 볼 수 있는 행려병자 모습이었다. 어디에도 대통령 경호실 차장과 특전사령관의 흔적은 없어보였다. 1979년 12·12 쿠데타 때 부하가 쏜 총에 맞고 강제로 전역당한 뒤 보낸 10년 세월이 어떠했는지 초라한 시신이 말해 줄 따름이었다.

사건기자 때 직·간접으로 목격했던 수많은 끔찍한 시체들보다 그의 시신은 더 충격을 주었다. 장군이었던 그의 시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의 역사, 탐욕이 낳은 하극상과 배신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충격의 여파는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살아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행태 때문이다.

정병주 장군이 어떠한 군인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의 죽음의 실마리가 되었던 12월 12일 장군들의 전쟁에서 누가 잘했는지, 누가 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군대는 적과의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쿠데타에 동원되면 어떤 합법성과 도덕성도 가질 수 없다. 단순한 폭력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나라의, 휴전선과 45km 떨어진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총질을 할 수 있는가? 정병주 특전사령관 아래서 제1공수 여단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던 전두환 소장은 국토방위를 위해 국민이 허락해 준 군대를 불법 사용해 정상적 민주국가 군대의 장군이라면 있을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키고, 배반의 역사를 만들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거나 다치면 그것은 군인의 영예이다. 그러나 정권을 빼앗기 위해 작심하고 덤벼든 부하의 총알에 다치고, 마침내 강제로 군복을 벗어야 하는 것만큼 억울하고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군인의 오욕이요, 군대의 수치이다.

어떤 명분도 정당성도 없는 싸움에서의 패자는 이름 없는 야산에서 목을 맸으나, 대한민국에 치욕의 군대 역사를 만든 이는 여전히 살아남아 승자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는 한 때 백담사에 유배되고, 반란죄와 내란죄, 뇌물죄 등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한때 사형수였던 과거를 잊은 채 무리지어 골프를 치러 다니며, 육사생도들의 사열까지 받는 등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나서고 정치 훈수두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670여억 원의 추징금 납부를 외면하는 등 서슴없이 법을 무시한다. 그런 그에게서 명예와 도덕성, 진실성, 전략적 능력과 같은 장군의 도를 찾을 수 없다. 용기와 호탕함을 가장한 유치한 객기만 보일 뿐이다.

세계의 독재자들은 대체로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미국 텔레비전 방송과의 회견에서 “모든 나의 국민들이 나를 사랑한다. 그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터키의 7대 대통령이었던 케난 에브렌 대장은 현재 96세이나 국가반란죄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결코 재판을 받지 않는다는 터키의 전통이 깨어진 것이다. 그는 전두환 소장보다 한 해 늦은 1980년, 공산주의 혁명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의 정부는 23만 명을 재판에 넘겼다. 그 가운데 51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50명은 처형됐다. 에브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무부의 금융범죄조사위원회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고 있다’는 2001년 이후 그의 재산 상황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했으며 1980년부터 20년간의 재산도 조사 중에 있다. 에브렌은 병상에서 법정으로 생중계된 진술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늘이라도 힘이 있고 쿠데타가 요구되는 상황이라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하겠다”며 “오로지 역사만이 나를 심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1989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지방 휴양지에서 암살을 몇 차례 모면하면서 20여 년을 은둔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카다피나 에브렌과 비슷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은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년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업적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장군이나 대통령이 가져야 할 어떤 염치도 없도록 만든 것은 한국 사회의 왜곡된 가치관 탓이 크다. 사람들은 한줌의 육사 출신 장교들이 뭉친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며 마치 조폭 집단과 흡사한 행세로 군대를 완전 장악했던 그를 카리스마 넘치는 우두머리로 미화하기 일쑤였다. 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천문학적 액수의 큰 돈을 펑펑 뿌려대는 그를 통 큰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전별금 등의 명목으로 받은 장관, 장군들이 줄줄이 그를 따라다니며 아부하는 모습을 의리 있는 행동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헌법이 정한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그가 아니면 할 수없는 헌정사의 용단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전 전 대통령이 세상을 향해 부끄러워하겠는가. 차라리 우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전 전 대통령이 한때 상관이었던 정병주 장군이 목을 맨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마지막 참회를 할 것인지 궁금하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전두환#정병주#군인#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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