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60>가을나무의 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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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나무의 말
―김명리(1959∼)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엎어지는
저 또한 못 믿겠는 사람 심사를
목마른 가을나무들이 맨 먼저
눈치 채지 않겠는가


‘붉디붉은 붉나무/샛노란 엄나무’라! 시어들과 가락에 우리 고유의 정서가 철철 넘쳐흐른다. 김명리는 풍류를 아는 열정의 시인이다. 고르고 고른 단어들로 벼리고 벼린 맵시가 일품인 시를 쓴다. 그러한 그가 ‘맹세는 깨어졌다’라고 직설적 단언으로 시를 여는데, 이 또한 절묘한 맛이 있다. 네 마음 변한 걸 이제 나도 알겠다. 이 배신자여! 그 배신자, 얼마나 섬뜩할까. 그러나 화자는 원망과 분노를 억누르고 가을나무를 지켜보며 과격한 심사를 다스린다. 서리서리 엉겨 있는 정념과 정한을 자연의 형상으로 절묘하게 풀어낸다.

저 가을하늘, 멍투성이 내 마음처럼 시퍼렇구나. 그 아래 새빨갛고 샛노랗게 단풍든 나무들! 세월이 가면 다 변한다. 나무들 색깔만 변하는 게 아니다. 봉숭아꽃 짓이겨 칭칭 동여매서 짙게 물들인 내 손톱도 그 봉숭아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꽉 차 있던 마음이 내려가 있다. 네 마음이! 어쩌면 내 마음도. 너를 애타게 기다리느라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깨어진 네 맹세처럼 부러져버린 이 손톱! 가을나무도, 초록이 지치면 단풍 드는 게 아니고, 사람의 심사를 눈치 채고 변하는 거다!

인간관계에서는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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