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의 ‘광고 TALK’]<8>들이대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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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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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당사진관 광고.
천연당사진관 광고.
찰칵! 꽃잎이 분분히 날리는 봄날, 누구나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댄다. 스마트폰으로도 한 컷. 사진이란 찍는 게 아닌 들이대기의 미학이다. 앨프리드 스티글리츠가 새로운 사진의 기치를 내걸었던 사진 분리파 운동(1902년)은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상사진과 기록사진을 찍는 촬영국(撮影局)이 1883년 서울 대안동(大安洞·안국동 일원)에 처음 생겼다. 사업가 황철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촬영 기술을 배우고 사진기를 구입해와 자신의 사랑채를 개조해 조선 최초의 사진관을 열었던 것.

천연당(天然堂)사진관 광고(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6일)에서는 ‘특별염가 불변색(不變色)’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부인(婦人)은 내당(內堂·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부인(婦人)이 촬(撮)하고 출입(出入)이 심편(甚便·매우 편하게)함”이라는 보디카피를 쓰고 있다. 천연당사진관은 1907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당시의 신문에 여러 차례 시리즈로 광고를 냈다. 남녀가 함께 사진 찍기를 꺼리던 당시의 보수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여성의 사진 촬영은 고용된 여자 사진사가 맡는다고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사진관 입구에서 남자를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출입이 편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른바 소비자 혜택의 강조. ‘불변색’이라는 카피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같은 총천연색은 아니어도 색을 입히는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사진이 보급되어도 서민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고, 사진관은 기존의 초상화 시장을 점차 잠식해나갔다. 초상사진과 풍경사진 같은 기록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사진이 등장하자 전통 회화에 익숙하던 조선인의 시각체계 역시 서서히 바뀐다. 그러나 사진에 찍히면 혼령이 달아난다고 믿었던 사람도 많아, 사진이 대중화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려 유명해진 채용신(1850∼1941)이 근대 초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데는 사진과 똑같은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선전했던 비즈니스 감각도 한몫했을 터. 하지만 어쩌나, 사진은 이미 위력적으로 들이대는 신문명이었으니.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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