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박종호]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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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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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미리 말하자면, 죽기 전에 굳이 하고 싶은 것이 나에게는 없다. 그것은 하고 싶은 일은 늘 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하고, 그래도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해야 한다고 판단된다면 비로소 실행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정해 놓고 살아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옳다. 그러나 오직 그 목표만을 위해서 달리다 보면 그동안 다른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희생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진정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산다. 하고 싶은 일에는 나를 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위해 하는 일도 포함돼 있다. 물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만은 없으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지향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수고와 연단과 인내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라면 더 크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가치 있으며 멋진 인생 후반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그런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소비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드는 나이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에 나아가서 이름을 떨치고 자신의 구상을 펼치는 일이 가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만을 위해서 아름다운 사적인 삶과 내면적인 일상을 희생하는 것도 안타까운 것이다.

경남 함안군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주재성의 고가(古家)에는 하환정(何換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어찌 바꾸리요’라는 뜻이다. 주재성의 높은 학식에 조정에서는 세 번이나 관직을 권하였지만, 그는 매번 고사하면서 “여기서 자연을 벗 삼아 공부할 수 있는 나의 자유를 어찌 벼슬을 받아들여 노예 같은 일상과 바꾸리요”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세상의 많은 곳을 유람했다. 특히 극장을 좋아하여 외국에서 본 공연이 1000편을 헤아린다. 그러나 경험을 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공부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슈니츨러를 읽고 프로이트를 읽고 말러를 듣고 빈을 방문하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채 껍데기만 보고 왈츠나 듣고 오는 사람의 체험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내일 세상이 끝나도 후회 없을 것처럼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세상의 많은 책을 더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어려서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15세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 그때부터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는 부두 노동자, 식당 웨이터, 일용 노동자 등을 전전하면서 10여 권의 사회철학서를 저술해 미국 사회에 정의로운 방향을 세웠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말한다. 정말 그렇다. 책을 읽지 않는 한 어디를 가든지 맹인이요, 무엇을 보든지 까막눈이며, 무슨 일을 도모하든지 허망한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진정 가치 있는 책들을 찾아 읽어서 세상의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싶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흔히 목적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거 배워서 어디다 써 먹으려고?”라는 말을 무심히 한다. 사용하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없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탐구해 보라면 그 공부는 누구나 즐거워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부요, 자유로운 삶이다.

세상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결국 길도 자유도 책 속에 있었다. 세상의 좋다는 여러 곳을 배회하였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곳은 책으로 가득한 나의 작은 공부방이었다…. 죽는 그날까지 책 속에 빠져보고 싶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정신과 전문의
#박종호#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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