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새벽편지]다시 聖者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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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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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 영등포역 부근 요셉의원 앞을 지나다가 우리 시대를 살다간 성자를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다. 요셉의원은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1987년에 선우경식 원장이 개원한 무료 병원이다. 내과의사인 선우 원장은 21년 동안 미혼인 채 극빈층과 노숙인에게 무료 진료활동을 펼치고 자신의 소원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다가 2008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언론에서는 ‘노숙인의 아버지’ ‘영등포 슈바이처’ ‘우리 곁에 왔다 간 성자’라고 그를 기렸다.

요셉의원은 내가 선우 원장을 처음 찾아갔던 1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마치 노숙인처럼 낡고 초라한 3층 벽돌 건물 그대로였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요셉의원을 후원할 목적으로 발간된 잡지 ‘착한 이웃’의 편집위원 자격으로 만났을 때 그는 환자를 위해 고심하는 말을 하면서도 시종 진지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평소 “가난한 환자들은 신이 내게 내려주신 선물”이라는 그의 진실에서 우러나온 미소여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뒤에도 나는 그를 몇 번 더 만났는데 “처음엔 3년만 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5년이 지나도 후임자가 안 나타나 요셉의원이 아니면 아무 데도 갈 곳 없는, 목욕해주고 이발해주고 치료해줘야 할 그 수만 명의 환자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고 하면서 오직 병원과 환자 이야기만 했다. 그의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는 “결혼식장에 가서도 하객들이 가져가고 남은 뷔페 음식을 노숙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큰 울림 주고 떠난 성자들

우리 시대엔 늘 이렇게 우리 가까이 성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바쁘게 살면서 늘 그들을 잊고 살았다.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달나라에까지 가겠다”고 한 마더 테레사 수녀를 잊고 살았고, 세계 곳곳에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해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마련해준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를 잊고 살았다.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만 일생을 바친 장기려 박사도, 성 나자로마을 원장으로 평생 한센인을 위해 살다간 이경재 신부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최근 우리 곁을 떠나면서 “고맙다”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도, “이슬 한 방울조차 버리는 연꽃잎처럼 살라”고 하신, 다비의 과정에서도 무소유의 정신을 철저하게 보여주신 법정 스님의 귀한 목소리도 이젠 잊었다.

부끄럽다. 다시 그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동안 나의 삶은 성자적 삶을 살고 떠난 그분들에 의해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삶의 품격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분들을 다 떠나보내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서로 자기가 옳고 남은 그르다고 주장하고, 남을 위한 말없는 실천보다는 나를 위한 말 많은 주장이 더 앞선다. 이토록 극심하게 자기주장이 강한 시대도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이해와 소통의 문이 닫혀 있어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럽다.

이제 이 시대에 성자는 존재하지 않는가. 그분들과 같은 성자가 다시 내 삶에 찾아오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드러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자적 삶을 사는 분들은 많을 것이다.

언젠가 서울역 지하도에서 만난 이발사를 잊을 수 없다. 서울역에서 남대문경찰서 방향으로 나가는 약간 통행이 뜸한 지하 통로에 중년의 이발사가 길게 자란 노숙인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었다. 의자에 앉히고 흰 가운을 두르게 하고 정성껏 가위질을 하는 이발사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 바로 우리 시대의 성자의 모습이었다. 차가운 지하도 바닥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몇 명의 다른 노숙인들이 이발사에게 보내는 감사와 신뢰의 눈빛을 통해서도 그의 그러한 모습은 더욱 성스러워보였다.

사실 노숙인은 제때 제대로 씻지 못해 얼마나 악취가 많이 나는가. 나는 지하철에서 노숙인이 앉았던 자리에 무심코 앉았다가 자리에까지 배어 있는 악취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벌떡 도로 일어난 적도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노숙인의 머리를 조금도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미소를 띠며 깎아주는 이발사의 성스러운 영혼 앞에 나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 뜻 본받을 일상의 실천을

이 시대는 지금 성자가 부재된 시대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비인간적 삶을 살아가는 비극의 시대다. 그렇지만 이대로 마냥 우리 곁을 떠나간 성자를 그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초라하더라도 내 삶 속에 그분들을 본받을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게 다시 우리 시대의 성자를 기다리는 일의 시작이다. 노숙인의 이발사처럼 나 자신이 먼저 평범한 일상적 삶 속에서도 성자적 삶의 태도를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거대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고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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