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제 資産도 못 챙기는 한심한 한나라당

  • 입력 2007년 4월 27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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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대북정책 노선 갈등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쪽이나, “바꾸려면 차라리 간판을 내려라”는 쪽이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주위만 해도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많을 텐데 정작 문제의 핵심을 짚어 내는 사람이 없다.

한나라당에 필요한 것은 자신감의 회복이지 ‘논쟁’이 아니다.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주류 보수정당이라고 해서 북한과 반목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적극적이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2월에 이미 설악산-금강산 공동 관광지역 개방을 20개 시범사업의 하나로 북에 제의할 정도였다. 1985년 9월에는 분단 40년 만에 이산가족 방문을 성사시켜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에선 더욱 활발했다. 1989년 9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내놓음으로써 처음으로 통일 과정과 통일 후(後)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고, 1991년 12월에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남북관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남북기본합의서 외면한 DJ

이 과정에서 어찌 기복이 없었겠는가마는 강물은 쉼 없이 해빙(解氷)을 향해 흘렀던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만 해도 정말 정교한 대북정책의 복음서다. 이 안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필요한 모든 조치가 들어 있다. 양측은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아니하며, 군축을 실현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민족경제의 균형발전을 도모하자”고 약속하고 있다. 4장 25조로 된 기본합의서가 잘 지어진 집이라면 김대중(DJ) 정권의 햇볕정책은 그 집에 달린 많은 창(窓)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본합의서가 1992년 2월 발효되고서도 대북정책의 장전으로 자리 잡지 못한 데는 DJ의 책임도 크다. 남북관계에 밝다는 DJ가 그 가치를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재임 중 기본합의서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DJ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정일과 마주했을 때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 문제를 거론했어야 했다고 본다. 두 사람이 6·15공동선언에서 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이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더라면 이후 우리가 겪은 극심한 정체성 혼란과 남남 갈등은 크게 완화됐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좀 더 차분해야 한다. 논쟁을 하려거든 당이 어떤 대북 정책자산(政策資産)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도 그렇다. 꿀릴 이유가 없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6월 판문점에서 북측과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서도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했을 뿐이다. 합의대로 그해 7월 25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열렸더라면 남북관계 개선은 그만큼 앞당겨졌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양측의 교섭이 투명하게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이홍구 통일원장관과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은 공개리에 판문점에서 만나 협상을 매듭지었다. 비선조직이 동원되고, 5억 달러의 뒷돈이 들었던 DJ와 김정일의 정상회담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때 회담이 성사됐더라면 우리는 투명하고 깨끗한 남북 정상회담의 전통을 세울 수도 있었다. 오늘처럼 정상회담이 정략의 산물로 변질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괴감 대신 발전책 모색해야

한나라당이 자괴감에 빠질 이유가 없다. 권위주의 시절,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공격적인 대북정책으로 이를 커버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있긴 했어도 그것이 대북정책의 순도(純度)를 가늠하는 기준일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DJ 역시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것 아닌가. 노벨상 욕심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한나라당은 논쟁 대신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킬 궁리를 해야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라는 훌륭한 내비게이터가 이미 장착돼 있으므로 운전만 잘하면 된다. 액셀러레이터를 너무 밟으면 과속이 되고, 브레이크를 너무 밟으면 차가 안 나간다. 번갈아 가며 조화롭게 밟아 줘야 한다. 주류 보수정당의 대북정책이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서야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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