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대통령이 말을 아낀다면

  • 입력 2008년 7월 24일 02시 49분


말을 해보면 적어도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그 한국 사람도 이제 달라지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나는 말을 잘 못한다. 나와 같은 세대의 대부분 친구도 말 못하기는 오십보백보다. 이럴 때 새삼 우리는 한국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 세대에도 말솜씨 좋은 친구는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 말재주 좋은 친구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싫어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어렸을 때엔 말을 잘하면 어른께 칭찬을 받지 않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사내 녀석이 말이 걸어 얻다 쓰느냐고….

윗세대 어른의 언어관은 오랜 전통에 뿌리박고 있었다. “말이 교묘하면 어질지 못하니 군자는 말이 서툴기를 바란다”고 공자는 타일렀다. 노자도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며 “착한 사람은 말이 많지 않고 말이 많은 사람은 착하지 못하다”고 적었다. 세상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장자(莊子)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말이 서툴고 말재주 좋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말솜씨

요즈음 세대는 다르다. 우리 세대처럼 구시대의 유교적 전통을 지닌 부모의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고 현대적 교육을 받은 신시대의 부모 밑에서 자라난 세대. 글의 유교보다는 말의 기독교가 더욱 힘을 얻는 세상에서, 책보다는 텔레비전 시청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세대의 말솜씨를 보면, 한국 사람도 이젠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걸 실감 안 할 수 없다.

대통령의 말부터 변화를 실감케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동서양의 교양을 아무도 따라오기 힘든 높은 수준에서 두루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화석화된 19세기 조선시대’ 언어를 구사하는 이 대통령의 말은 어눌했고 구술한 한문 투의 담화문은 답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부 출신의 무관이었지만 그의 서찰은 정부관서의 어느 문민 출신 고위관리보다 문장의 격과 품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말을 아낄 줄 알았고 과묵으로써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다만 그가 독점하던 방송망을 통해 이따금 특별담화를 한 시간 이상 끌고 난 뒤, 대기했던 어용 교수들이 그에 관한 해설 토론을 할 때엔 참 따분한 세상에 사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하 없는 독재자도 지루한 ‘말씀’을 억지로 한 시간 이상 듣도록 강요할 재주는 없다는 걸 몰랐던 것일까.

방송을 독점한다는 점에서는 같이 욕을 먹고는 있어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달랐다. 드골의 방송연설은 5분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루하기보다 되레 서운할 정도로 짧은 연설의 앞뒤에는 ‘국가와 함께 공화국 만세! 프랑스 만세!’로 맺곤 했다. 이를테면 그림을 틀(액자)에 넣어 돋보이게 하듯 드골의 말도 어떤 틀 안에 넣어 주변의 여러 말, 많은 군말과 나눠 놓는 대통령홍보실의 연출 솜씨가 볼만했다.

대통령 차원에서 한국인도 이제 달라졌구나 하고 느낀 것은 나보다 젊은 분이 등극한 노무현 대통령부터다. 변호사에 기독교인이니 달변일 수밖에 없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도 일반 서민, 때론 서민 이하의 말투를 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점잔을 빼는 시민에겐 뺨을 맞는 듯한 충격조차 주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대통령의 반(反)권위주의적 미니 문화혁명을 호의적으로 보려 애썼고 4500만 명의 국민 중에서 막판엔 두 사람만 저울에 올려 5년 동안 나라를 떠맡기는 대통령 책임제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도박이냐 하는 것을 몸으로 입증해주는 노 대통령의 노고를 평가하려 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믿음 주어야

그리고 그 다음-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무게 없는 말로 대통령 책임제 정부의 문제점을 갈수록 많은 국민에게 시위해주는 이명박 대통령. 그를 보니 공자 말의 나머지 부분도 마저 적어 두고 싶다.

“군자는 말은 서툴더라도 행동은 민첩하고자 한다.” 몸이 말에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안다면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얘기다. 대통령이 말하는 기회를 반으로 줄이고 말을 할 때도 하고 싶은 말의 반만 하면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의외로 빨리 회복되지 않을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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