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누가 누구를 단죄하는가

  • 입력 2004년 10월 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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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카라얀은 사진에 대해 신경질적이라 할 만큼 까다로웠던 것으로 유명했다. 어떠한 스냅 사진도 비서에게 보이고 사전 허락을 받지 않으면 공개될 수 없었다. 동아일보사 초청으로 그가 타계하기 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한을 했을 때 그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다.

서울에서의 첫 연주가 끝나자마자 그는 일정을 죄 취소하고 돌아가겠다고 야단을 쳐서 주최측을 애먹였다. 연주 중 객석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는 것이다. 빌고 달래서 가까스로 이뤄진 2회 공연 때 나는 거장의 일거수일투족이 잡힐 듯한 앞자리에 앉았다. 연주가 끝나자 젊은 팬들이 카메라를 들고 무대 앞으로 다가갔다. 카라얀은 우레와 같은 박수는 아랑곳없이 무대 밑의 열성 팬들에게 계속 손을 흔들어 촬영금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면…▼

야속하게 보일 수도 있는 처신이었다. 그러나 40년을 지탱한 카라얀 신화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다.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모습을 어느 한 순간 낚아채는 사진의 마술은 같은 사람을 천사처럼도, 악마처럼도 보이게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외모도 그렇다면, 한 시대 한 사회의 모습은 어떨 것인가. 그걸 한두 개의 단면만 확대해서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6·25전쟁 때 인공 치하의 3개월, 일제 강점하의 35년, 혹은 독일의 경우 나치스 치하의 12년…. 그때 그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치고 부역 혐의에서 완전무결하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과거를 단죄하려는 자는 ‘그’ 과거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으로 결백무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때 그곳에 있지 않은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가령 6·25전쟁 때의 이른바 ‘도강파’. 서울 사수를 약속한 정부가 저희끼리 피란가면서 한강교를 폭파해 버리고 수복 후 돌아와서는 인공 치하에서 갖은 고생 끝에 살아남은 시민들의 부역 여부를 가린다 했을 때 ‘잔류파’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명령 복종의 죄밖에 없는 젊은 공병감을 한강교 폭파의 희생양으로 총살해서 그 원성을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

과거를 따지겠다고 할 때, 흔히 그 자리를 벗어나 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고초를 겪은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우월 의식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오만한 잠재의식이 밖으로 드러나 국제적으로 망신을 한 경우가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다. 그는 이스라엘 방문 때 ‘뒤에 태어난 사람의 은복’이란 사려 깊지 못한 말로 나치스의 과거에 대한 자신의 무관함을 표백하는 어이없는 실언을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으나 저항운동가로 망명지에서 돌아온 빌리 브란트는 스스로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에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동시대인을 대신해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어 세계를 감동시켰다. 망명 유대인인 미국 예일대의 사학자 피터 게이는 브란트가 뉴욕의 유대인 집회에 와서 독일의 젊은이들을 무죄 방면해 주라고 열변하는 것을 듣고 감동했다는 얘기를 자서전에 적고 있다.

▼뒤에 태어난 사람들의 오만▼

나는 일제 치하와 인공 치하를 살아 본 세대로서 그때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어떤 환상도, 어떤 자기오만도, 물론 어떤 자기비하도 없이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 근래 수많은 학문 분야에서 연구주제가 되고 있고, 그럴수록 과거를 다루는 사적인 기억이나 공적인 기록이 ‘문제적’이라 함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청산이란 용맹스러운 기치를 들고 정치권 안팎에서 ‘뒤에 태어난 은복’을 만끽하며 그때 그곳에 살며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을 시원치 않기 이를 데 없는 잣대로 추궁하고 단죄하겠다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광복 후 태어난 은복으로 도덕적 결백을 자만하는 그들이 그때 그곳에서 자신들의 부조(父祖)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선 그것이나 제대로 잘 알아 챙기고 저리도 목청을 높이는 것인지….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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