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송호근/중산층이 무너진다

  • 입력 2004년 1월 15일 18시 37분


코멘트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보루인 중산층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말이다. 중산층의 소득이 줄고, 구매력이 죽고, 성장의욕이 감퇴했다. 정신(spirit)의 쇠락은 무엇보다 큰일이다. 한국사회를 지켜 온 건전한 교양의 수원지가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 궤도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자살이 급증했다. 사회 발전을 향한 의욕과 투지, 천박한 행위에 품격을 주려는 노력, 누가 뭐래도 상식과 원칙을 고수하려는 의지가 급속히 쇠퇴했다. 중하층민이 하층민으로 곤두박질치고 빈민층이 늘었다.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중산층 규모는 10∼15% 정도 줄었고, 도시의 절대빈곤층은 10가구 중 1가구꼴로 늘어났다. 외환위기 후 6년, 참여정부 1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모습이다.

▼약체 클린턴정부 경제살려 전공 ▼

이즈음에서 필자는 지난 1년 동안 참여정부가 무엇을 했는지를 정중하게 묻고 싶다. 작년 내내 한국사회는 정치인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시끄러웠는데, 이젠 진저리가 난 그 소란이 다시 우리의 새로운 시간을 오염시킬 태세다. 그 일련의 시련은 카리스마 정치가 끝난 뒤 우리가 필연적으로 건너야 할 ‘눈물의 계곡’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서민 대통령이 탄생했고, 권력기관이 중립화되었으며, 검찰과 법원의 정치적 독립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민주화 투쟁이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는 게 문제다. 여전히 국민의 진을 빼고 있는 정치개혁에 집착해서 경제가 내팽개쳐졌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변명은 있을 것이다. 적에 둘러싸인 채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또는 도처에 반(反)개혁 세력이 덫을 놓아 되는 일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4월 총선에 목을 매는 것인가.

나는 이 변명 논리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약체 정권일수록 사회적 경제적 업적을 내야 정치적 장애물을 돌파할 여력이 생긴다. 탁월한 정치 지략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적으로는 제로베이스를 맴돌았다. 미국에서 최약체 정권이던 빌 클린턴 행정부가 설득과 협상전략을 통해 경제안정을 구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거물급 야당 인사를 백악관에 자주 초청해 정책 협조를 구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외환위기 이래 최악의 성장률을 해명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의 청사진은 아예 없었다. 준비하느라고 소중한 1년을 보내고도 경제 드라이브를 발동할 기미가 없다. 민간기업만 걱정이 태산이고 나날이 닥쳐오는 난관을 뚫느라 분주하다. 이대로는 재도약이 불가능하다. 이 속도라면 참여정부 5년 만에 한국사회를 지탱해 온 중산층의 펀더멘털이 거의 와해될 것이다.

그래서 연두회견에서 보인 대통령의 다짐은 반갑기 그지없다. “일자리야말로 최고의 복지이고 가장 효과적인 소득분배 방식인 만큼, 일자리 만들기를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거다. 그러나 말은 누가 못하랴. 그 말이 신뢰를 얻으려면 확실한 프로그램, 그것을 책임질 효율적인 국가기구, 유능한 관료, 그리고 국민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일궈 내는 것이, 그래서 소기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정치력이다.

▼성장-집중 전략으로 선회해야 ▼

그런데 청와대를 보라. 각료들과 고위 관료들을 보라. ‘1만달러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기획이 필요하고 무엇이 시급한지를 따지고 있는가를. 그들의 관심은 어디로 가 있는가. 대통령이 결단이 진실이라면 참여정부가 초기에 내걸었던 정책목표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분배에서 성장으로, 분산에서 집중으로, 균형에서 불균형으로 전략 선회를 감행해야 한다. 왜냐고? 성장, 집중, 불균형 없이는 1만달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발독재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2만달러 달성에 성공한 20개 선진국들은 20년 전에 예외 없이 그런 전략을 택했다. 토론, 참여, 균형, 분배라는 누구나 환영할 그 방식은 1만달러의 나라에는 여전히 버겁고 무겁다. 그나마 분배라도 잘했다면 모르겠거니와.

송호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 hknsong@snu.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