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증오의 정치, 평등의 경제

  • 입력 2005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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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는 자비심, 사랑, 박애 같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가 하면 증오, 탐욕, 시기심같이 버리고 싶은 것들도 있다. 악성세포가 더 활발하고 치명적인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후자들이 더 강하고 적극적이며 인류 역사에도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탐욕이라는 이기적 본능이 경제 발전의 가장 큰 동기가 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몰두하는 돈벌이 때문”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경제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다.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꽃피운 나라 미국의 건국 원로들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견제도 해야 하지만 부자들이 애써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이 함부로 흔들지도 않는 나라를 만들자’는 신념을 가졌다(김동길 역사 강연).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물질적 성공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불릴 만큼 탐욕의 결실인 부(富)가 부러움을 살지언정 증오나 질시의 대상은 아니다.

탐욕이 동력인 자본주의와 달리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증오심과 투쟁심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결정되어 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에 대한 적개심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레닌 등 직업 혁명가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집권하고 정권을 유지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는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홍위병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수모를 겪었던가. 북한이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미국을 ‘원쑤’로 설정하고 인민에게 투쟁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것도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도구로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다. 이처럼 증오, 갈등, 적개심이 속성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아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당연히 자본주의 국가이다. 그런 전제 아래 참여정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변 현상들을 살펴보자. 정부는 집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서울 강남이나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을 “전 국민의 2%밖에 안 되는” 부동산 투기자들로 묘사해 나머지 지역 주민들의 적개심을 유발시켰다. 세금을 가장 많이 납부하는 어느 대기업은 과거사를 놓고 시민단체와 여당이 퍼붓는 몰매에 상처받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격하되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 때 드러난 증미주의(憎美主義) 모습은 북한이 주장하는 외세 배격주의와 그대로 닮은꼴이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외교 면에서는 잃는 게 많았지만 정권에는 그쪽 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회였다. 독도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촉발된 반일감정은 (일본이 원인 제공을 했지만) 여론을 결집해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정권의 정략적 ‘항일운동’에 의해 확대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인들이 하버드대나 예일대를 갖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도쿄대와 교토대가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서울대는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학생을 뽑아가는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고교 공교육을 망치는 대학”으로 치부되고, 집권당으로부터는 “교육부의 방침을 뒤엎지 못하게 초동 진압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적대시되고 있다. 그런다고 교육의 불평등이 해소될 리 없지만 정권에는 우리 인구 중 훨씬 더 많은 비서울대 출신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더 수익성 있는 선택일지 모른다. 동아 조선 같은 정통 언론도 한 집권당 의원의 말처럼 이 정권에는 ‘독극물’에 해당하는 증오의 대상이다. 비판언론에 대한 정권의 적개심이 광복 이후 언제 이토록 심했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많이 선택되는 두 신문은 오늘날 대통령에 의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명색이 자본주의 국가인데 이 정권 들어 일어나는 일들은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걸어온 증오의 정치, 투쟁의 정치, 적개심의 정치와 어쩌면 이렇게도 유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증오심은 바이러스만큼 감염이 쉽고 확산이 빠른 위험한 감정이다. 정권이 앞장서서 국민에게 증오심의 불을 지피는 나라가 세상 어느 자본주의 체제에서 또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인가 사회주의 국가인가.

이규민 경제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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