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프리즘]장소원/民生 비추는 ‘달빛 정치’를

  • 입력 2003년 9월 9일 16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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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가까워오면서 달이 점점 커지고 둥그레진다. 밤하늘에 퍼지는 달빛을 보면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떠오른다. 문학작품의 제목으로 이보다 감상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월인천강지곡’이란 하늘에 떠 있는 1개의 달이 땅 위에 있는 1000개의 강에 비치는 것을 노래한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자비로움이 모든 중생에게 내리는 것을 온 누리에 퍼지는 달빛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떠나는데 이전투구만▼

추석 보름달은 유난히 커 보인다. 추석은 그래서 더욱 풍요롭고 은혜로운 절기인지도 모른다. 사실 추석은 수천년 동안이나 이어 온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둥근 달을 보면서 한 해의 풍요로움을 즐거워하고 가족의 정을 느끼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보고픈 부모형제를 만나기 위해 끔찍한 교통체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00만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일에 매인 많은 젊은이들은 하늘의 달을 보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집을 그린다. 특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민들이 고국 생각에 가장 많이 눈물짓는 것도 이즈음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홈쇼핑 업체가 이민 상품을 내걸어 무려 17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며칠 후에 실시한 2차 판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주문이 폭주했다고 한다. ‘이민 중개’를 상품으로 만든 홈쇼핑 업체의 발상이 기발하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사실은 신청자의 평균연령이 30대였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라의 원동력이 돼야 할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나라를 등지려 하는 현상은 왜 빚어진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살고 싶지 않은 나라’의 국민이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는 신토불이 운운하며 산도 물도 우리 것이 좋다고 입을 모으지 않았던가.

이 나라에선 17초에 1건씩 범죄가 발생한다. 카드 빚에 몰린 사람들이 종종 대담한 강도 행각을 벌이고, 그중 마음 약한 이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유괴와 성추행이 두렵고 아이를 키워 학교에 보내면 사교육비와 촌지 문제 등으로 골치가 아프다. 여름철만 되면 학교 급식을 먹은 학생들이 집단 식중독에 걸리고, 아이들을 수련회에 보낸 부모들은 건물이 무너지거나 불이 날까 노심초사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지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를 나타내는 출산율은 1.17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이대로 가면 젊은이는 자꾸만 줄어들 텐데, 정작 애타게 아이를 원하는 불임부부에게는 어떠한 의료보험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곧바로 고급실업자가 됨을 의미하고, 20, 30대의 직장인들은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을 다니면 월급 도둑)’니 하는 말을 들으며 앞날에 대한 희망을 접는다.

나라의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인들은 ‘김두한 시절’을 방불케 할 정도의 난투극을 벌인다.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던 이들이 지금은 누구를 위해 서로 머리채를 쥐어흔들고 멱살을 휘어잡고 있는가.

▼‘월인천강지곡’의 위안 그리워▼

학창시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서로 분리된 영역인 줄 알았다. 성인이 돼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결국은 정치와 맞물려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정치는 과연 어떤 수준일까. 요즘은 차라리 저녁마다 텔레비전의 뉴스를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내 심정이 이럴진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등지려 하는 것도 이해가 될 듯하다.

요즘 우리에게는 ‘월인천강지곡’의 달빛이 필요하다. 그것은 종교적 위안일 수도 있고 훌륭한 정치에 의한 행복감일 수도 있다. 기상예보에 따르면 올 추석에는 보름달을 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달이 없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장소원 서울대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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