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박호성/형식주의 병폐

  • 입력 1999년 12월 16일 19시 28분


우리 사회는 어떤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까.

예전에 유럽을 난생 처음 구경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체험이 있었다. 그곳에 다녀와서는 충격을 받은 듯 제일 먼저 신기하다며 꺼내는 말이 대체로 “거, 유럽의 집들에는 울타리가 없어”하는 식이었다. 담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미숙련 삽살개라도 충분히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나지막한 울타리가 전부다.

그에 비해 우리의 집들은 어떠한가. 유럽과는 판이하다. 시멘트로 험상궂은 장벽을 쌓아 올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담 위에 촘촘히 박아 놓고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둘러 쳐 마치 토치카처럼 보이던 주택들이 특히 우리 도시에서는 흔히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다가 왕왕 ‘맹견주의’라는 엉터리 경고판까지 턱 하나 걸려 있기 일쑤였다. 가히 완벽한 안보체제 구축이라 할 만하였다.

▼'겉만 번지르르' 만연▼

우리는 범람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까지 이렇게 완전무장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요새 같아 보이는 담벼락도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안방까지의 진입은 식은 죽먹기 식이라는 사실이다. 창문고리나 현관출입문의 개폐장치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다. 부질없는 그 담장을 보고 안방의 보석함이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낙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하루종일 열려 있기 일쑤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정은 성이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긴 하지만 안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버티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자물쇠 장치와 물 한방울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빈틈없는 창틀이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식은 허술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튼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다. 겉은 맹수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속은 새우처럼 물러터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형식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현실의 흐름 곳곳에도 폐수처럼 의연히 녹아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겉으로는 당당히 활개치는 듯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가령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것들이 겉모습이 허술해서 무너져내렸던가.

▼IMF 위기등 자초▼

하나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던 우리 민족이었다. 요컨대 보잘 것 없는 겉모양보다는 훌륭한 내용을 뒤쫓던 게 바로 우리의 전통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지금은 안에 든 것보다는 그릇이나 포장에 더욱 신경쓰는 형편으로 뒤바뀌어버렸으니 어쩌다가 이런 곱던 마음가짐이 행방불명되어 버렸을까. 우리 현실은 지금 ‘장맛보다는 뚝배기’라는 한국적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테면 안에 든 장은 엉터리로 남겨둔 채 뚝배기만 근사하게 꾸며놓고 희희낙락하는 동안 우리는 IMF의 된서리를 맞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도로표지판이다. 노자 선생도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나 진실이 아니라 꾸밈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이 형식주의를 극복함으로써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박호성(서강대교수·정치학)

《다음회 필자는 서울대 박명진(朴明珍·언론정보학)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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