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진단]임동욱/여론조사의「함정」

  • 입력 1999년 6월 4일 10시 24분


세상사를 대할 때마다 갖는 고민 중의 하나는 발을 딛고 사는 현실과 이에 대한 정부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 문제이다.

체감 물가와 정부발표 물가간의 차이, 체감실업률과 정부발표 실업률간의 괴리가 이러한 거리감의 대표적인 예이다. 언론을 뒤덮고 있는 세칭 ‘옷 로비’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제시한 해법의 준거인 여론조사 결과와 체감 여론간의 차이 역시 동일한 범주에 드는 문제이다.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수준과 정부의 인식 및 정책대응 사이에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나라를 제대로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인식 때문에 본질이나 진실에서 일탈된 정책대응이 나타난다면 개별 정책과 현실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원론적인 의미에서는 진정한 여론이 형성되고 이 여론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진정한 여론의 형성과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역사적인 흐름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같은 ‘진정한 여론’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유용한 도구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여론을 담아내느냐 하는 것은 이 도구의 질이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 있다.

여론조사가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론조사는 철저하게 과학화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론조사가 잘못되는 것은 의뢰자 조사자 보도자라는 세 여론조사 주체의 비과학적인 내적 외적 행동 때문이다.

세 주체의 행동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릇된 조사결과가 ‘진정한 여론’으로 추정돼 정책 결정의 잣대가 되고 국민 분위기를 선도하는 사태도 일어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결과는 이러한 것인데…”라는 의도를 가진 계획되고 계산된 오류를 비롯해 비과학적인 표본수, 조사방법의 선택, 조사 시기, 조사원의 자질, 은밀한 유혹인 유도성 질문,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묻는 질문지, 균형감을 상실한 선택지, 자기 잣대로 해석한 기사와 제목 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론조사가 잘못될 수 있는 소지는 하나 둘이 아니다.

여론조사의 신뢰를 좀먹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표본의 크기, 의뢰자, 완전한 설문지 문안, 표본오차, 모집단의 정의, 표본추출된 집단에 대한 정보 및 자료수집 방법, 실사 기간, 결과해석의 근거 등을 반드시 공개해 조사의 과학성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것을 요구하는 나라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기와 생각이 같은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여론조사는 본질적으로 ‘생각 엿보기’이다.

생각을 엿보는 작업이 생각을 지배하는 작업으로 변질되거나 나라 정책의 참고자료가 아니라 유일의 결정자료로 변해서는 안된다. ‘옷 로비’ 사건과 관련된 여론조사에서도 안타까운 점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선택지나 질문지가 균형감을 상실했다는 문제점은 접어두더라도 대통령이 제시한 해법의 준거인 여론조사의 모든 것을 낱낱이 공개하고 그 과학성을 객관적으로 검증받는 것이 제대로 된 여론정치를 하는 단초일 것이다.

임동욱(충주대교수·조사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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