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흥재]근대와 현대 얼굴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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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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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사람들의 제일 큰 관심사는 역시 사람이다. 사랑과 미움, 분노, 슬픔 등 우리의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습 중에서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은 단연 얼굴이다. 느낌이나 감정이 모두 얼굴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근엄한 근대의 표정과 다양한 현대의 얼굴들이 100년의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이상과 허상의 꽃으로 피어나는 초상의 향연이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우리 옛 사람들은 ‘일호불사(一毫不似) 편시타인(便是他人)’이라 했다. 즉, ‘터럭 한 오라기라도 다르면 바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라며 똑같이 그렸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서는 ‘성어중(誠於中)이면 형어외(形於外)’라 했다.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이 밖으로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초상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전하기 위해 사실적으로 외모를 그려내야 했다.

전통 초상화에서는 여성만 그리지 않은 게 아니라 젊은이도 그리지 않았다. 왜 젊은 시절의 꽃다운 얼굴은 그리지 않았을까? 하필 주름지고 늙은 노인만 그렸을까? 젊은 청년들은 학문도 수양도 경륜도 아직 이루는 과정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학문적 경지, 수양의 정도 그리고 인생의 경륜을 보여주려고 초상을 그렸던 것이다. 예쁘고 잘생긴 외모를 그린 것이 아니라 참된 모습, 즉 외면이 아닌 정신을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상은 인물의 정신을 담아내는 허상이면서 또 결국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상의 목적은 인물을 기리는 일

고종의 어진을 그린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의 초상에서 근대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 눈이 또렷하고 형형한 눈빛을 읽을 수 있다. 대개 오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 유건(유생들이 쓰던 실내용 두건)을 쓴 선비의 모습이고, 방안이나 탁자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이 놓여 있어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유학자들의 이상적인 자세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초상을 통해 얼굴들이 한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선시대 문장가 홍순학은 초상을 통해 아들 홍경하와 생전의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홍순학 초상은 석지 채용신이, 아들 홍경하는 채용신의 아들 채상묵이 그렸다. 채용신과 그의 아들 채상묵, 손자 채규영이 초상작품으로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고종과 명성황후가 부부로서 그리고 아들 순종이 가족으로 만나 살아 있을 때 못 다한 이야기꽃을 밤새 피워내고 있다. 고종황제가 태어난 지 160년이 되는 올해, 1866년 3월 21일 양력으로는 5월 5일 바로 오늘, 가례를 올렸던 고종과 명성황후가 146년 만에 해후를 하는 셈이다. 초상이라는 존재를 통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한자리에서 왕과 왕비가 아닌 가족으로 만나는 일 또한 처음이다.

현대로 넘어오면 그 얼굴들은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이다. 손연칠 작가가 종이에 채색한 고은 시인이나 시인 김남조 선생님, 이원희 작가가 유화로 그린 권옥연 화백이나 탤런트 고두심 씨의 모습은 이상과 허상의 꽃 초상으로 잘 피어났다.

이종구 화가는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비료포대에 그렸다. 그것도 호적등본의 이름 위에다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동재가 그린 마오쩌둥(毛澤東)의 크리스털 초상은 반짝반짝 빛나고, 쌀알로 그린 마오쩌둥, 또 별로 빚은 그의 초상은 별처럼 영롱하다.

초상을 그리는 목적 중 하나는 인물을 기억하고 그를 기리는 일이다. 그래서 현대작가 김홍식은 석지 채용신, 김홍도, 윤두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을 그려 우리로 하여금 기려야 할 인물로 강조하고 있다. ‘모나리자’는 이이남 작가에 의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면 모나리자도 눈이 따라 움직여, 항상 보이는 존재에서 자신도 보는 존재로 바뀌었다.

선조들 내면의 정신세계 전해

석지 채용신은 ‘채석강도화소’라는 공방을 운영하며 고객이 직접 내방하거나 올 여건이 안 되면 사진을 보내도록 했다. 또 사진이 없으면 사진사를 보내서 사진을 찍어주는 맞춤서비스를 한 현대적 의미의 전업 작가 1호라고 할 수 있다. 채용신과 아들 상묵 그리고 손자 규영 3대는 초상화 가업을 일구며 전문성 있게 공방을 운영하고 전단을 통해 현대적 의미의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채용신은 전문화가로서 근대 미술기 전업 작가로서 선구적 모습인 것이다.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은 화가로 산 일생의 후반기를 익산 정읍 등 전라도에서 살다 익산 왕궁에 묻혔다. 또 그가 그린 많은 초상의 주인공이 전라도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채용신과 근·현대 초상을 전북도립미술관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석지 채용신이 살아 숨쉬는 한국의 초상미술 속 얼굴들의 대화를 들으면 이 찬란한 봄이 더욱 아름다워지리라 확신한다.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문화 칼럼#이흥재#초상화#전북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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