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박범신]문화적 소외에 대한 관심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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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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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소설가
박범신 소설가
요즘 페이스북에 일기 형식의 짧은 글을 자주 올리는데 얼마 전엔 이런 내용의 글을 올린 적 있다. 요컨대 우리에겐 ‘중간지대에서의 발언’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든 종이매체든, 좌나 우, 혹은 적과 아군의 목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그 글의 일부를 요약해 올리자면 이렇다.

“간단히 말해 풍속과 제도가 충돌할 때, 풍속이 타락했다면서 더 엄격히 제재하려 하면 이른바 보수가 되고, 풍속이 변했으니 풍속에 따라 제도 자체를 바꾸자고 하면 진보가 된다. 가령 조선사회에서 과부가 애를 낳는 일이 많아졌을 때, 애 낳는 과부를 더 엄히 다스리자면 보수이고, 애 낳는 과부도 존중하도록 법을 바꾸자 하면 진보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현대 민주사회에서 100% 보수, 100% 진보가 있다면 불순한 목적을 가진 정파주의자이거나 광신도일 것이다. 광신도 곁에 신이 머물겠는가. 진보적 보수나 보수적 진보, 나아가 경계인, 회색인 등이 많은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중간지대에서의 발언’이 없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얼핏 보면 오로지 정파주의로 무장한 ‘전사’들이 발언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미디어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회엔 ‘중간지대의 발언’적어

정파적 발언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가을부터 자주 고향에 내려가 있는데, ‘서울 수준’의 안락하고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서울 수준’의 커피 맛을 보는 게 쉽지 않다. 그럴 만한 커피숍이나 카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캘리포니아 곳곳을 열흘쯤 여행한 적이 있었다. 궁벽한 산골로 들어가서도 내가 선호하는 커피 맛을 찾아내고, 선택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것이 커피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 고유의 차 맛 역시 대도시로 올라와야 비로소 손쉽게 맛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지방의 도시에서 어쩌다 만나는 연주나 콘서트에서도 서울에서의 그 감동적인 가치를 누리긴 쉽지 않다. 같은 연주가인데도 돈을 적게 받아서 그런지 어쩐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지역에 있으면, 의식주는 물론이고 모든 문화에서, 자본에 따른 몰인정한 서열을 매일 확인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니 ‘서울발 좌우’의 편 가르기는 서울 못지않으나, 삶에선 당연히 ‘뒤떨어졌다’고 느끼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힌다.

중심과 변방은 무엇인가. 힘으로 치면 서열 높은 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중심이고, 문화적으로 치면 우수한 문화예술 생산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에 불과하다. 요즘은 자본 독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 능력을 가진 서열에 따라 세계가 재빨리 재편된다. 문화예술의 우수한 생산자도 자본을 좇아 ‘서울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중심은 날이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고 변방은 점점 더 소외된 낮은 자리로 내려선다. 터무니없이, 차라리 정치적인 힘이 자본을 능가했을 때가 때로 그리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분배는 ‘경제’의 문제만이 아니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정치가들 일부는 경제적 환경만 나아지면 사람들의 불만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지금이 어디 절대 빈곤의 시대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평으로서의 ‘문화적 환경’이다. 문화적 환경의 개선 없인 ‘중간지대’에서의 발언 또한 계속 실종 상태일 것이다. 한때는 의식주 문제 때문에 경제적 환경의 개선을 갈망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문화적 격차에 대한 소외 때문에 말로는 ‘경제’를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 없는 지방자치단체들이 한때 다투어 문화예술공간을 근사하게 지었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공소처럼 비어 있다. 우수한 문화예술의 배달 시스템에 자본가 정치가 관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 격차 줄여 이념갈등 덮어야

경제적인 격차를 정책만으로 덮을 수는 없다. 좌우의 갈등 역시 공산주의가 아니고선, 돈의 분배만으로 덮는 게 불가능하다. 계급 갈등이나 이념의 편차에 따른 증오심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문화밖에 없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여러 정치집단에서 ‘쇄신’의 허장성세와 함께 다투어 보편적 복지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데, 중심과 변방의 문화적 격차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소외를 줄이려는 공약은 거의 없어 보이니 한심하다. 저들은 멍청해서 우리의 근원적 갈증을 읽어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본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파이’만을 키우기 위해 짐짓 모르는 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 됐든, 문화적 격차를 간과한다면 누가 정권을 잡든 우리의 실망과 좌절은 반복될 것이다.

박범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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