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서현]무지개는 딱 일곱 색깔?

  • 입력 2007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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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팔꽃이 싫다. 연유를 알려면 나의 초등학교 시절 자연 과목 시험지를 들춰 봐야 한다. 거친 스케치가 더 거친 등사로 옮겨진 그림이 어떤 식물의 잎이냐고 묻는 문제가 있었다. 내 눈에 분명 그것은 우리 집 앞마당에 무성한 포도나무 잎이었다. 그러나 정답은 교과서에 실린 대로 나팔꽃잎. 칼로 긋듯 단호하고 무참하게 포도나무를 가로지른 빨간 채점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개의 합창도 나를 속였다. 존재하는 모든 빛깔의 스펙트럼이 무지개다. 그러나 이 일곱 색의 묶음은 어린이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곱 색의 크레파스만 고르라고 강요한다. 나는 주어진 문항에서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뭐냐고,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네 가지 중 뭐냐면서 개인의 감수성을 묵살하는 질문들이 싫다.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이고 달 표면의 모습은 토끼 모양이라고 강요하면서 상상력을 틀어쥐는 교육적 폭력이 싫다.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는 고등학생들에게 자연계와 인문계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모든 학문을 두 종류로 일도양단할 수 있다는 과감하고 명쾌한 제도는 인문계의 경제학이 자연계의 건축학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수학적 지식을 요구한다는 정도의 사실은 말끔히 무시한다. 필요 없고 의미 없는 이분법은 학제 간 연구를 강조하는 세상의 흐름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듯 오늘도 고등학생들을 나눠 놓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건축과에 진학하겠다는 나는 건축과를 자연계의 갈래에 밀어 넣은 교육 제도 때문에 고등학교 내내 최외곽 전자의 수에 따라 오비탈의 모양이 어떻게 변하는지, 엽록소의 탄소동화작용 과정에서 산소가 어디서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조선시대 서생들처럼 달달 외워야 했다. 하지만 정작 도도한 서양사의 흐름에서 비잔틴 문명의 의미가 무엇이고 데카르트의 회의적 사고방식이 모더니즘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가는 일언반구도 들은 바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대학가가 먹고 마시는 유흥가로 덮여 있다는 한탄은 새삼스럽지 않다. 지금 대학생들은 중고등학교 꽃 같은 시절의 문화적 감수성은 모두 뭉개 버리고 시험을 위한 시험 문제로 덮인 문제집을 외우던 바로 그 학생들이다. 이들이 대학에서 채우는 문화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먹고 마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또 먹고 마시다 졸업해서 만드는 도시 풍경이 소화기와 생식기만 달고 사는 외계인이 만든 것처럼 초현실적이고 몰가치할 수밖에 없는 것도 좌절스럽게 당연하다.

교육계가 씨름판도 아닌데 교육부와 대학이 샅바를 서로 잡겠다고 소란스럽다. 내신 성적 반영비율이니 학교 간 학력 차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적인 획일성의 강요와 일사불란한 감수성의 요구를 어서 걷어 내는 것이다.

성적을 비관해서 옥상에서 떨어지는 학생이 속출하는데도 입학생의 학력 수준이 낮다고 개탄하는 사회는 무책임하고 잔인하다. 개탄의 주체들은 암기력으로 무장하던 시대의 잣대를 전리품처럼 내세우며 새로운 세대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냐고 먼저 의심해야 할 일이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입학시켜 교육하는 것은 인생삼락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수준 낮은 학생들이 입학한다는 불평은 선생에게는 사치이고 직무유기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이 자연인의 사회화를 위한 제도이고 강제와 훈육을 도구로 하여 시작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개인의 억압이 이 시대 교육이 여전히 동원해야 하는 가치라고는 믿을 수 없다. 체벌로 인한 상처는 시간이 가면 낫는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지식 구조와 집단체조식 감수성의 강요로 인한 상처는 평생 낫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내게서 빼앗은 나팔꽃과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온전히 전해 주어야 한다.

서현 한양대 건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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