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용희]‘짝퉁’은 가라

  • 입력 2006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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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허위가 말할 수 없이 우리를 위로해 줄 때가 있다. 그것을 감미로운 허위라고 해야 할까. ‘낭만적 연애의 꿈’ ‘부자에 대한 희망’ ‘아름다움에 대한 흠모’…. 영화야말로 허위의 꿈을 만족시켜 주는 완벽한 매체다. 스크린은 하얗게 비어 있는 공백인데도 우리는 무수한 빛의 난무 속으로 빠져 들고 마는 것이니.

자본보다 이미지가 훨씬 광휘를 발산할 때가 있다. 자본 그 자체보다 자본이 풍기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맛보려 한다. 최근 가짜 명품 시계가 5000만 원짜리 명품 시계로 둔갑해 유명 연예인과 국회의원 부인 등에게 팔려 나간 사건이 있었다. 가짜 명품 라벨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냈으니 한국은 참으로 가짜와 모조의 기술국이다. 최근 ‘된장녀’ 논란에서도 불거졌지만 명품만을 찾는 사람들의 허영과 사치에 우려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 짝퉁 명품은 엄연히 지적재산권에 대한 침해다.

그러나 이제 누가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돌팔매질을 당할지 모른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 잔을, 나머지 한 손에는 모토로라 휴대전화를 들고 그녀는 서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청바지는 젊음과 진보와 자유와 낭만을 상징하는 기호였다. 이제 청바지는 찢어지고 질질 끌리는 미학으로 문화적 차별화,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근사하게 보이기를 바란다. 상품이 자신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대신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실 문제는 명품이 아니라 그것을 좇는 사람들이다. 급속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상실감을 치유하려는 위무제일 수 있다. ‘존재감의 결여’를 상품에서 찾고 기호의 소비로서 존재감을 회복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사태 때 예민한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대학은 졸업했으나 취업의 길이 막막한 297세대(1970년대에 출생해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20대 연령층)를 주목해 보자. 이들의 문화적 인식은 이미 선진화되고 소비 수준은 기성세대와 같지만 소득은 청소년 수준으로 남아 있는 형태다.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297세대는 문화적 욕구를 짝퉁 명품에서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선망하는 허위와 그 허위 욕망의 소비로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기를 원했을 수도.

그것은 결국 타자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자아의 존재감을 찾는 ‘기생적인 정서구조’일 뿐이다. 명품 중독자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 “어머, 이거 거기 거 맞지?” 남의 인정에 의해 행복감이 결정된다. 광고가 던져 주는 환각이 있다. “이 상품은 당신을 자유주의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제품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갖고 다니는 것이다”…. 명품을 걸치거나 입는 것은 서구적 자유주의자, 고급 취향의 호사가처럼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명품을 선호하거나 짝퉁 명품이라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은 귀족처럼 신분 상승을 한 듯한 ‘가상적 만족감’을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가짜(허위 욕망)에 자신을 맡길 때 영원히 자신은 ‘원작의 대리물’에 불과하다. 허위 이미지가 실체를 잡아먹게 될 때 자신 또한 짝퉁이 되고 말 것이다. 명품에 대한 과도한 욕망, 짝퉁 명품의 양산은 결국 진정한 문화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다. 문화적 소양은 명품의 과시적 노출에서가 아니라 부드러움과 자유로움, 진보적 관용을 지니는 스스로의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존재감의 기반이 약할수록 화장은 진해진다. 중요한 것은 위장과 과시에 의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스스로의 격조를 높이는 일이다.

김용희 문학평론가·평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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