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재훈]사적지 일본식 조경 눈에 거슬려

  • 입력 2006년 5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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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양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조경 양식은 내부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조경은 16세기를 넘어서면서 불교의 선종(禪宗) 문화에 의하여 고산수(枯山水·물 없이 바위 모래 등으로 산을 꾸밈) 양식의 축경(縮景)식이다. 정원 속의 수목은 자연의 형태로 축소시킨 분재가 된다. 분재가 돼야 석조(石組)의 응축된 공간 속에서 서로 조화된다. 그래서 일본 정원 속의 수목은 모두 전지되어 사람의 손으로 길들여진 관상수가 된다.

674년에 조성된 경주 안압지는 일본 조경의 선구적 양식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괴석을 배치하고 무산12봉(巫山十二峯)의 선산(仙山)과 삼신도(三神島)를 못 속에 조성한 축경식이다. 수준 높은 산수화의 대가가 설계한 선경의 원지(苑池)다. 그런데 안압지 가의 선산이 소나무가 자라면서 숲에 가리어 안 보이게 되어 간다. 삼국사기에 보면 석가산에는 화초만 심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6세기를 넘어서면서 성리학적 산수관에 의하여 조경의 양식이 달라지게 됐다. 성리학적 사상관은 사실의 정신에 의한 실재성과 현실주의적 실용성을 근본으로 삼는다. 무식(無飾), 무화(無華)의 조선 조경은 근검절약의 평범한 생활관과 인간적이고 솔직한 정직성, 철저한 평범, 아무 기교도 조작도 없는 진실 그대로의 조경 양식이 조성되었다. 왕궁에서 민가에 이르기까지 자연 순리에 따라 인간이 자연에 동화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한국 조경을 형성하는 요소는 지형, 건물, 지당(池塘), 개울, 괴석, 가산(假山), 기물, 담장, 다리, 보도 등이다.

이렇듯 조경은 자연환경, 유적의 기능과 그 유적을 조성한 사람들의 생활양식, 그 유적을 조성한 시대의 사상적 가치관, 그 사회의 제도와 규범, 조영기술과 재료 등에 따라 달라진다. 시기에 따라 경관 조성의 개념이 다르며 그 기능에 따라 설계 주안점이 다르다. 기후와 국토의 자연환경이 다르고 민족의 생활양식이 다르며,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적 가치관이 다르면 조경 양식도 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주택정책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식 주택 양식의 개량이 시행됐다. 그래서 서울의 5대 궁 등 조선 왕궁을 비롯한 사찰, 주택, 관청, 학교, 공원 등의 조경이 모두 일본식으로 많이 바뀌었다.

필자가 옛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장 등으로 있을 때 유적지 조경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애썼지만 아직도 전국의 사찰이나 민가, 학교 등에 일본식 조경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효창공원 안에 있는 김구 선생 묘소에 오르는 계단 좌우에 전지된 관상수가 심어져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일본식 조경이 새로 조성되기도 한다. 청계천의 광통교, 수표교 주변에도 일본식의 고산수 석조 양식으로 수로 변을 조성했는데 전통양식으로 조성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국사의 앞마당엔 구품연지가 묻혀 있다. 석대에 내밀고 있는 높이 3m의 석루조에서 폭포로 물이 떨어지게 하면 얼마나 장관일까. 구품연지 속에 영상으로 비치는 불국사의 경관은 정토의 경관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렇듯 조경 유적이 잘 관리되지 않거나 원 모습을 상실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왜곡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식 조경과 전통 조경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고 전통 조경에 대한 인식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국가 문화재를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청이나 서울시에 전통조경직이 없다는 사실도 조경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재훈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전통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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